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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세모 Dec 15. 2022

공동생활의 시작, 기숙사

새내기 새내기

위치 : 대학교 기숙사 기간 : 2년

면적 : 약 4.6평

특징 : 2인실. 각 층 공용화장실과 공용 샤워실, 휴게실. 다른 동에 세탁실, 매점, 운동실, 식당

구성원 : 룸메이트 1

구비된 가구 : 침대, 옷장, 책상, 책장


입학 하루 전, 우리는 간소한 짐을 싸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탔다. 부모는 신입생이 된 나를 합격한 학교의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뒤 함께 짐을 풀고 점심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응원과 격려와 걱정의 말을 건네고 나서 다시 먼길을 내려갔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관악사 신관이라고 불리는 곳의  926동으로 학부 기숙사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다. 오래된 캐노피가 맞이하는 입구 계단을 밟고 건물로 들어가면 정면에는 건물 위로 향하는 계단이, 양쪽에는 복도가 있다. 그중 오른쪽 복도를 따라가 맨 끝에 서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가장자리의 문을 여니, 신발을 벗을 수 있는 작은 현관과 2인을 위한 옷장 2개, 2층 침대, 책상 2개가 단촐하게 있었다.


926동 1층 오른 복도의 끝 방 안 2층 침대 중 1층 침대자리

가 앞으로 1년간 지낼 곳이었다.

동조교는 안내사항과 함께 당신의 룸메이트가 외국인이며 그래서 며칠 후에 입주할 거라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렇군요.”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 차원의 속셈인 건가?

타인과 방을 공유하는 일도 처음인데, 그 타인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설레었다.

기숙사에서 보내는 첫날 해진 밤, 정인이와(설명하려면 긴 같은 과 내 친구) 만나 기숙사 주변을 거닐며 시간을 나누다 벤치에 앉아 이야기도 나누었다.


첫날만큼은 아직도 장면이 그려지지만 여기까지!

몇 년 전만 해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던 대학생활이 흐릿하다. 가물가물한 그 시절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헤집고 당시 썼던 핸드폰과 일기장을 뒤적였지만 낚을 수 있는 장면은 몇 개 없었고, 매년 썼던 학생수첩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쉬면서 집중력을 발휘해 당시 생활을 떠올려본다.

기숙사 전체 구성은 이용자에 따라 학부생과 대학원생, 가족 구성원 등으로 나뉘어 이뤄졌고, 분류에 따라 서로 다른 내부 구조를 가졌다. 나의  주 생활공간은 단연 학부생 기숙사였다.  911-917동 구관 921동-926동 신관. 그리고 각각 남자동과 여자동으로 분리됐다. 각 생활동은 거의 비슷한 평면이었고, (누가 무엇을 위해 다양한 평면으로 지어주겠는가..) 각 실은 2인 1실 기준, 층마다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 휴게공간을 공유했다.

기숙사의 50프로는 갓 서울생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제공되고, 나머지 50프로는 신입생이 아닌 학부생들에게 소위 뺑뺑이라 불리는 방식으로 임의로 배정된다.

뺑뺑이인 척하면서 성적순으로 뽑는다는 요상한 소문이 돌았지만 내가 다음 해에도 기숙사에 붙어버린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냥 진짜 운이구나..’라고 모두가 인정하고 말았다.


1학년 1학기 룸메이트는 멕시코에서 왔다.

나는 첫 학기라 바빴고 멕시코 친군 한국 문화를 즐기느라 바빴다. 초반에 한국어 교재를 가져와 묻곤 했는데 드물어졌고 서로 마주치는 시간도 줄었다. 초여름 새벽,  그녀는 같이 서울로 온 친구와 늦게까지 놀다 들어와 엉금엉금 2층 침대로 둘이 올라갔다. 아래 침대에서 자던 나는 삐그덕 대는 소리에 몇 번 깼지만 불편한 겨를 없이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 쿵.

위층에서 자던 룸메이트가 2층에서 쿵하고 떨어졌고 놀라서 괜찮냐고 물었으나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노 프로블럼. 놀랐지 어서 자라며., 다시 엉금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쿵!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또 환하게 웃으며 삐그덕 삐그덕 대는 침대로 올라가 잠에 들었다. 그녀는 밝고 유쾌했으며 서울의 낮과 밤을 열심히 누렸다. 한 학기가 끝나고 돌아갈 때 알록달록한 멕시코 인형을 주면서 꼭 놀러 오라며 주소를 적어주고 찔끔의 눈물을 남기고 나선 떠났다.

다음 학기 룸메이트는 스위스에서 왔다.

대부분 나보다 방에 빨리 들어와 있었고 두 번인가 같이 외출을 했다. 그녀는 가족들과 주기적으로 화상통화를 꽤 길게 했고 종종 울었다. 어릴 때 공감이 부족했던 나는 그 마음과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떠날 땐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괜히 오바하며 작별인사를 건냈다. 그녀는 가족을 만나게돼 기쁜 동시에 서울을 떠나게돼 섭섭하다며 많은 눈물을 흘리고선 떠났다.


2학년 때부터는 룸메이트를 지정할 수 있었다.

기숙사 첫날 함께 산책을 했던 그 친구와 나는 같이 살기로 해서, 우리는 같은 동 같은 방으로 배정받았다. 1학년 때 살던 방과 크기는 비슷했지만 살짝 구조가 달랐다. 현관문을 중심으로 대칭돼 각 옷장, 침대, 책상이 놓여있었다.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침대 머리엔 책상이 붙어있어 허구한 날 중도에서 빌려온 책을 책상에 쌓아놓고 방에 박혀 침대 위에서 책만 읽었던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이 시절 딱 하나의 장면만 뽑자면 물건으로 어지러운 책상, 책상 모서리와 침대 머리맡 한구석에 높이 쌓아둔 책들, 간간히 함께하는 맥주캔, 침대에 엎드려 책을 보는 나란 사람…  


사실 과거의 나는 별로였으므로 스무 살 시절 따윈 소환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당시의 나는 여느 또래들처럼  친구들과 종종 어울렸으나 그만큼 자주 쓸쓸했으며. 어쭙잖게 우정을 믿었지만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느라 눈치가 없었다. 남들과 다를 게 없었는 데도 스스로 특별하다고 오해하기도 했고, 보잘것없다고 좌절하기도 했다. 생각은 많았지만 깊이가 얕았고 누군가의 순수함이나 순진무구함을 부정했으며 세상에 삐딱했다. 무엇보다도 어떤 것에도 간절함이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그냥 풋내를 숨겨도 풋풋했던 대학생이었다..


디지털화된 추억은 3차원 실제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서 자꾸 잊히지만 편지는 물리적으로 공간을 차지하므로 잊힐 쯤이면 떡하니 얼굴을 내밀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고로 기억엔 없지만, ‘편지로 또박 남아있는 사실들’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

방 청소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나도 정인이도!

2년째엔 925동 202호에 살았다.

방학 땐 잠시 923동 301호, 919동 314호에도 살았다.

우리는 왜 방학이면 자기가 머물 주소를 공유하고 편지를 주고받곤 했을까.

우리는 왜 긴 여행을 가면 꼭 엽서에 쓸데없는 말을 써서 보내곤 했을까.



상자에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편지들


2년 동안 무려 4곳의 방을 썼다.

방학 때 기숙사에 머무르고 싶으면 방학 동안만 쓸 또 다른 방에 배정되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건물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종강 후 집에 내려가는 학생들은 짐과 방을 빼고 남은 학생들을 모아 몇 동은 폐쇄하고 몇 동만 사용한다. 이래저래 우리는 분기별로 짐을 이고 지고 잠자릴 옮긴다.

따라서 개인 짐을 늘리지 않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방에 보관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기숙사에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방 진짜 집과 택배가 오간다.

여름이 시작되면 으로부터 여름옷을 올려받고, 겨울옷과 봄옷은 내려보낸다. 바람이 불면 외투와 주전부리가 오고, 여름옷은 간다. 이때 필요 없이 했던 쇼핑들은 엄마에게 들통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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