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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세모 Jan 28. 2023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곳에 있는

집이라는 첫 기억, 그냥 집

위치 : 전라남도 영광

기간 : 1989. 가을쯤 - 2006.02

면적 : 대지 약 85평, 집 약 24평

특징 : 개량한옥 1채, 조적조 1채, 마당. 텃밭.  89년 아버지께서 구입해 이주정도 수리를 끝낸 뒤 이사함.  

구성원 : 다섯 식구. 아빠, 엄마, 나, 남동생, 그리고 할머니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살았던 집은 사라졌지만 그곳에 있었다.


   친구들과 뒷산, 공터, 골목길, 아파트 놀이터 등 동네 여기저기서 신나게 놀다 보면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다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 생각에 힘차게 달리다. 도착 전 마지막 사거리, 잠시 멈춘다. 오른쪽 코너 할머니 말 벗네 구멍가게를 너머 양옆으로 두리번거린 뒤, 길을 건너 오르막을 올라간다. 오르막에서 평지가 되는 시작점, 그 지점 오른쪽으로 뻗은 막다른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성큼성큼 스무 발짝쯤 디디면 회색 대문이 턱 서있다. 옆 집 할머니 댁이다. 멈춘 자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몸을 틀어서야 우리집 파란 대문이 나를 반긴다.


   “저 왔어요.” 소리치면서 벨을 누른다. 문이 탁 열리면서 반대 수화기에서도 이제야 “강아지냐?” 라고 묻지만 난 벌써 마당을 지나 콘크리트 기단 위에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건축에 대한 생각 없이 건축을 경험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를 들면 문의 손잡이를 보고 숟가락을 거꾸로 한 모양 같다고 생각한 경우가 그러하다.’고 했던 페터 춤토르가 그러하듯 넓은 오르막을 올라 좁은 골목길을 지나 비탈진 시멘트 마당을 오른 뒤 낮은 기단을 밟고 성인 무릎만큼 떠있는 마루에 마지막으로 오르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 길에선 다른 집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 이 집에 들어오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꺼어익 알토음 소리를 내던 대문 왼쪽엔 셋방을 주던 매스가 골목을 상대로 담장을 만들며 자리잡았고 오른쪽에 있는 뜰은 대지 경계를 따라 집을 둘러쌌다. 정원이자 텃밭인 뜰에는 솔(서울사람들은 부추라고 부르지만 우리동네는 솔이라고 한다. 솔전, 솔지..), 대파, 양파, 쪽파, 고추, 애호박, 늙은 호박, 해바라기, 무궁화, 장미, 백일홍, 수선화, 토끼풀, 이름 모를 꽃들과 더불어 대추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보리수나무, 감나무, 무화과나무가 각자의 영역에서 자랐다.

아무래도 나에게 이 집의 묘미는 과실수였다. 대추나무만 우리 가족이 심었다.

추운 겨울이 가면 담장너머 옆집 큼지막한 백목련을 따라 자그맣고 하얀 앵두꽃이 봄을 알린다. 또 금세 연분홍색 살구꽃이 흐드러진다.

집안 어른들이 봄의 화사함에 감탄하는 사이에 어린 나와 동생은 얼른 꽃이 지고 열매가 맺고 익길 바란다.

일등은 앵두. 일 년 중 앵두가 붉게 익은 며칠 동안만은 내가 대장이었다.

친구들이 궁금해하던 소식을 알릴 시간이다. “다 익었다.”

그 날은 우르르 여럿이 재잘대며 우리집으로 가서는 앵두를 맛본다. 앵두가 질 때까지 친구들은 내가 있건 없건 우리집에 들려 앵두도 먹고 할머니한테 인사도 하고 간다. 


   애기 입술같이 귀여운 이 열매를 먹는 법은 다음과 같다.

내 키로 딸 수 있는 앵두를 한 움큼 딴다. 높은 곳부터 익기 시작하니 손 닿는 곳이 채 익기 전까진 어른들이 따준 걸로 한 움큼 쥔다.

툇마루에 걸쳐 앉는다. 

입을 크게 벌린 뒤 손 위 빨갛고 투명한 알들을 한 번에 넣는다.

우물우물 과육을 삼키고 입술을 오므려 씨들을 모아 접시에 탁 뱉고 남은 과즙을 꿀꺽. 상큼한 맛에 기분이 좋아져 기단 위에 떠있는 다리가 절로 그네를 탄다.

접시에 파충류알 같은 씨들이 쌓일 때까지 반복한다.


   뒤따라 살구가 초여름을 품은 채 무르익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번 꿨던 꿈이 있다. 우리집 살구나무 옆에서 할머니와 함께 소리없이 웃으며 노는 꿈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살구나무란 단어는 유독 유년기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윤동주 <병원> 이라는 시도 떠올라 이 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그리운 할머니와 시의 분위기가 버무려져 쓸쓸해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즐거웠던 경험으로 기어이 기분을 환기시키고 쓸쓸한 마음은 버리지 않고 접어 둔다.

살구나무는 우리집 나무 중에 가장 컸다. 집보다도 높은 나무에서 열매 따기는 아빠 몫, 떨어진 살구 줍기는 우리 업무였다. 상처 난 살구는 흙으로 돌아가게 두고 깨끗한 아이들만 골라 바구니에 담는다.

손에 집힌 살구는 아기 솜털로 덮여 보드랍다.

옴폭한 꼭지에 엄지 두 개를 맞대고 가르면 씨앗과 말끔하게 나뉜 포슬한 속살이 향긋함을 은은하게 풍긴다. 침이 고여 얼른 알맹이를 껍질 채 집어삼킨다.

실컷 즐기고 남은 살구는 새콤하고 달짝지근한 잼이 된다.

우리집엔 흔한 딸기잼대신 키운 나무에서 얻은 과일로 손수 쑨 잼들 뿐이었다.

찐득한 여름이 끝날 때쯤 여무는 무화과도 수제 잼의 재료다. 입이 살짝 벌어진 무화과를 한 알 한 알 딴 다음 할머니는 늘 솜씨를 발휘했다.

설익은 걸 잘못 따면 꼭지에 하얗고 묽은 액이 나온는 데, 엄마에게 속아 맛 본 적이 있다. “이것도 우유야.” 퉤-얼굴이 찡그러지는 맛이었지만 우유처럼 생긴 게 우유 맛이 아닌 게 신기해 매년 맛을 봤다.

부엌에서 할머니가 칼로 무화과 껍질을 벗기고 있을 때면 그 옆에 앉아 하나를 집어 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곤 했는 데, “이게 더 단거여.” 라며 말랑한 알을 건네면 또 입을 벌려 날름 받아먹었다. 큰 솥에 손질한 알들을 전부 넣었다. 설탕은 넣지 않는다. 은근한 불 위에서 졸여지는 잼을 나무 주걱으로 사근사근히 젓고 있으면 달달한 향이 집 안에 가득했다.


   뒷터로 가면 어느새 보리똥이라 불렀던 보리수도 진붉게 영글었다.

우리집에서 다른 친구보단 인기가 떨어졌지만, 생김새만큼은 으뜸이었다. 아기자기한 꽃은 진녹색 잎들 사이로 연노랑빛 별처럼 수놓다 사라지면 기다란 꼭지마다 타원체 은빛 송이들이 몽글게 늘어졌다. 까끌한게 미니어처 키위같기도 했다. 알맹이가 울긋불긋 해지면 따먹기 시작하지만 무한대 빼기 1이나 무한대 빼기 100이 무한대인 것처럼 줄어들 줄 몰랐다. 탱글한 보리똥을 깨물면 시고 달고 떫은맛이 동시에 퍼졌다.

여운이 긴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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