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부코
4월엔 해야 할 일들 앞에서 자주 등을 돌린 탓에, 일의 진척은 더디기만 했다.
집에 돌아와 저녁만 먹으면 연체동물로 변한 채로 침대에 찰싹 붙어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몸을 던진다.
그래 몸이 있음을 잊지 말자.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고 야트막한 턱만 넘으면 확 트인 한강과 일렬로 듬성하게 서있는 긴 양버들나무들이 보인다. 현실적 공간에서 묘하게 비현실적인 저 나무들은 늘 안도감을 준다. 비례와 밀도, 채도도 바람의 흔들림도 주변과 살짝 엇박자를 타고 있어 -5년째 짝사랑 중인- 나무들의 사진을 찍고 나서, 왼쪽엔 강벽북로 오른쪽엔 한강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애써 무장해 보지만 사실 자신감이 없다.
나의 취약함과 모자람을 드러냈을 때 또는 드러났을 때 불편하거나 떠난다면 상처를 안 받을 자신도 없다. (졸리지만 대충이라도 마무리하고 자고 언젠가 다듬겠지란 생각.)
그런데 달리는 것만으로도 부정적 생각이 떨어져 나간다. 내 몸을 움직여 평소와 다른 속도로 주변 장면들이 바뀌게 하는 행위는 자주적 의지를 상기시킨다.
내 달리기는 엉망진창 멋대로 -힘껏 달리다 걷다가,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다가 또 힘껏 달리는데, 그렇게 해도 문제없다는 것는 사실에 상쾌하고 해방된 느낌이다.
가장 좋아하는 움직임은 발 앞꿈치에 스프링이 있는 듯이 살짝 콕 점프 콕 점프하며 뛰는 것.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리듬은 학생 때 대운동장에서 뛰던 시절과 고쌤의 스트릿춤에 반해 춤을 등록했던 최근의 과거와도 열결된다.
어쨌든 여러경험으로 어떤 사람이 어느 포인트에서 날 좋아할지 짐작할 수 있어서 사람에 맞춰 적당한 자아만 꺼내보인다.
선호체계보단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영역으로 정정한다. 여러 자아 중에서 골라 내보이는 데 드는 힘도 제각각이라 때론 가볍게 굴 수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시기도 있다.
이로써 이쪽 친구 세계, 저쪽 친구 세계, 일의 세계, 좀 더 친근한 세계, 사랑의 세계에서의 나는 다르고,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건 슬프다.
하지만 나도 나를 이해하기를 멈추고 타인들에게 뻗는다 . 아니면 도시 아니면 식물,동물, 글 그것이 유일한 돌파구다.
남의 글과 나의 글.
저녁을 먹고 작업실로 가는 길에, 00책 재밌더라고. 나는 그 책처럼 절대 솔직한 글을 쓸 수 없다고 우정씨에게 말하니, 하지만 툭툭 튀어나오는 자기애가 살짝 부담스러웠어요. 라고 했었나.
맞아요. 그래서 자신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죠.
가끔은 토해내듯 쓰고 싶어도, 매번 함축적인 말로 심연을 감춰버리는 사람에겐 그 과한 마음이 부러웠다.
여의도를 바라보며 달리다가 국회의사당과 나란해질 때, 뒤돌아 뛰었다.
(어젠 저 국회도서관에 절판된 책을 복사하러 처음 가봤다. 차는 근처 둔치주차장에 대야하는 데 주차를 하고 걸어가며, 시퀀스만 잘 짠다면 건물과 주차장을 분리시키는 게 역시 좋은걸..
어제 본 일 부코도 살구랑 언니보러 마실간 얘기도 달리기의 마무리도 다 못쓴채 우선 마무리 .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