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희 Aug 21.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겨울 햇살


  일 인실의 아줌마는 허리디스크 진단을 받고 정형외과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후덕하고 인심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아줌마는 병동 간호사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이며 주전부리 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인기가 좋았다. 방문객도 자주 찾는 편이라 병실은 소란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가급적 그 병실을 피하고 싶어 했는데 아줌마의 혈관 때문이었다. 링거주사나 간단한 채혈을 위해 혈관을 찾으려면 간호사들이 진땀을 흘려야 했는데, 돌고 돌아 수간호사 선생님도 몇 번 시도를 하고서야 아슬아슬 성공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환자도 고통스럽고 인심 좋은 아줌마의 얼굴을 봐야 하는 간호사들도 죽을 맛이었다.

  

아줌마의 남편은 지방 공무원이라 했다. 가정적이며 아내에게 언제나 다정다감했다. 척박한 곳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여자들의 삶이 당연하고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여겨졌던 내게 생소했지만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아저씨는 내가 야근할 때면 가끔 스테이션에 조용히 걸어 나와 본인은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처가에는 처남과 처제들이 많은데 다들 착하고 성품이 좋은 식구들이라고 했다. 나는 이곳이 낯선 외지이다 보니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람을 사귀는 것을 어려워했는데, 아저씨는 우스갯소리를 곁들여가며 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니 학생부 시절에 우리와 함께 지내며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던 전도사님 가족이 생각났다. 전도사님은 대구에서 오셔서 경상도 억양을 섞어 쓰셨다. 아내에게 언제나 정중했고 특별한 날에는 학생부 식구들에게 직접 밥을 해서 대접해 주기를 즐겨 하셨는데, 결혼하면 저런 모습으로 살아야겠다고 나의 결혼생활의 롤 모델이 되었다. 그때는 어렸고 전도사님의 그런 수고가 귀한 일임을 알지 못했다. 여하튼 그런 모습을 익힌 까닭에 개화기 때 선교사의 손을 잡고 떠나는 깡촌의 시골 소녀처럼 제주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 놓여 다정스러운 가정의 모습을 보게 되니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온 전도사님을 생각나게 했다.


  언젠가 투약시간이 되어 약을 돌리려고 아줌마 병실에 들어가 약 복용시간이라고 하면서 약을 건네는데, 지나가듯 무심하게 내게 물었다.


  "양 선생은 고향이 어딘가요?"


  나는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는 유독 민감해서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터라 빙빙 돌려 말했다. 


  "머나먼 남쪽인데요."


  "머나먼 남쪽?"


  "네. 바다도 있어요."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무 고개도 아니고"라고 하시면서 이어 말씀하셨다.


  "남핸가?"


  "그보다 더 남쪽에 있어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정답을 알려주었다.


  "제주도에요."


  의자에 기대앉았던 아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나는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는 걸 싫어했는데, 제주도라고 말하면 꼭 외계인을 보는 듯하게 쳐다보며 사투리를 해보라는 등 구경꾼을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환자와 보호자들끼리 말투가 어느 지방인지 쑥덕거리는 모습에 잔뜩 주눅이 들어 가급적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다. 흡사 영어를 못하는 내가 외국인을 만나면 그냥 웃고 마는 표정을 잘 지었다.


  아저씨는 그때부터 야간에는 간호사 스테이션에 종종 걸어 나와 양친은 계시냐, 형제는 어떻게 되는 냐는 등의 질문을 던졌는데 부드럽고 정중하고 진지했다. 그러면서 아저씨 집안 얘기를 섞어 말하기도 했는데 본인은 독자이나 처가는 형제가 많다고 했다. 오래전에는 처가에 갈 때 처가의 식구들이 어린아이들이어서 과자를 잔뜩 사서 박스에 담아다 주면 많이 좋아했었다는 말도 했다. 아무튼 아저씨는 짬 날 때마다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곤 했는데 집 떠나온 내게 든든한 아버지 같기도 했으나 내색은 못했다.


  어느 날 아저씨는 처가 식구들 중 한 처남 얘기를 했다. 그 처남은 착하고 빙그레 잘 웃으며 노래를 잘하고 성격이 아저씨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공군 소위로 임관되어 예천에서 복무 중이라고 묻지 않은 얘기를 소상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외지에 연고가 없었기로 아저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모른척하고 관심 없는 표정을 짓고 있어도 눈치가 빠른 영숙이는 복병처럼 나타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저씨가 네게 관심 있는가 보다."라고 하면서 킥킥 웃었다. 


  "뭔 소리야. 아저씨가 아니고 그 집 처남을 소개하고 싶어 해."


  "그래? 잘 됐다. 얼른 소개해 달라고 해."


  "얘는, 난 조만간에 집으로 돌아가잖아."


  "그게 뭐. 어때서?"


  토요일 오후 근무교대를 위해 점심 먹고 병동으로 출근했는데 아저씨가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무 인계 시간이라 여유가 없음에도 병동 라운딩 하는 틈을 타서 살며시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 복도 끝에 걸어가는 장교가 내 처남이여."라고 하며 손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복도 끝에 다른 일행과 함께 밖으로 걸어나가는 제복 입은 군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방 안에 들어서니 바깥의 햇살과는 다르게 그다지 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게 있는 큰 등받이 의자들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네 개씩 팀을 이루고 있었는데 사람 보다 의자가 많아 보였다. 약속시간에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남자 뒤통수로 보이는 머리가 반만 보이는 의자를 뒤로하고 출입문이 보이는 방향을 잡고 앉았다. 다방 아가씨가 엽차를 가져오자 손님이 올 거라는 말에 탁자에 놓고 갔다.


  나는 직접 털로 짠 빨간 반팔 스웨터를 겉에 걸치고 색상을 맞추느라 빨간 털 모자를 쓰고 나갔다. 정식으로 처음 단둘이 만나는 자리이니 긴장이 되었다. 십분이 지났다. 현관문을 빤히 바라보면서 부동자세로 앉아있었지만 제복 입은 남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십 분이 지났다. 돌아가야 되나 앉아 있어야 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사람은 오지 않아도 차는 마시고 가야 할 것이기에 다방 아가씨를 막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저, 혹시 누구 기다리는 중이신가요?"


  내 뒤에서 뒤통수가 반만 보였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게 물어왔다. 둘이는 서로의 얼굴이 부딪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 유지한 채 쳐다보았다.


  "네."라고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짭은 대답이 나왔다.


  남자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아서 내게로 걸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혼자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찾지도 못하는 곳에 파묻어 앉아 여자더러 찾아내라고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약속시간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길래 TV 보느라 시간이 지난 줄 몰랐어요."


  남자는 약속시간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양쪽 뺨에 보조개를 만들었다. 애써 설명하는 남자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편치 못했던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하면서 안개가 걷히듯 상대방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서 걸어 나와 목례를 하며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제복을 입고 있었고 모자를 무릎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고 앉았다. 그제야 모자를 벗고 있어 상대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까이서 탐색하듯이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남자는 얼굴 이목구비가 분명했고 제복이 주는 이미지를 더하여 반듯한 느낌을 주었다. 남자는 저음의 목소리로 조용하고 짧게 말했고 나는 높은 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튼 둘이 앉아있는 모습을 지켜봤는지 다방 아가씨가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주문을 받으러 왔다. 아마도 먼발치에서 우리의 어이없는 장면을 눈여겨봤을지 모른다. 아가씨는 주문받은 차와 설탕이 들어있는 작은 그릇을 함께  가져왔다. 남자는 주문한 커피잔에 설탕을 타서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고 나는 쪼그만 병에 빨대를 끼워 넣은 요구르트를 단숨에 홀짝 빨아 마셨다. 등을 마주해서 기다리다 보니 아까운 시간이 흘러 삼 교대로 근무하는 내가 출근시간이 되었다. 


  서로 신상 조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 싱거운 인사를 나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 쑥스럽고 어색한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의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걸어 올라오는 길에 겨울 햇살이 봄볕처럼 따스했다. 






이전 06화 판포리로 가는 길 - 만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