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있었다. 춘삼월이 되고 있다곤 하나 아직 꽃샘추위를 만나지 못했다. 아직 겨울옷을 벗어버리기에는 이른 날씨이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두껍고 무거운 옷을 벗어던졌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내린 곳에서는 포슬포슬한 흙을 비집으며 어린 싹이 햇빛을 향해 움터 올라오고 있다. 겨울을 버티었던 기숙사 앞 우거진 나목에서는 꽃눈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아 곧 싹을 틔울 준비로 바빠 보인다. 삼월이라는 어감이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만나는 직원들의 표정을 밝게 했으며 직원식당의 메뉴로 올라온 봄나물에 감탄한다.
병동으로 전화가 왔다고 식당에 인터폰을 통해 알려왔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남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전화를 받기 위해 수저를 놓고 병동으로 달려갔다.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신 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일이 주말이라 어쩌면 만나자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여자의 예감은 둔한 내게도 맞아떨어졌다. 전화기를 통해 내일 점심때를 맞춰 오겠다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마침 내가 휴무이기도 해서 모처럼 여유 있게 만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근무가 어떻게 되냐고 묻지도 않는다. 참 답답한 남자와 여자다.
삼교대 근무인 탓에 느긋한 마음으로 만나본 적이 없었던 서로는, 늘 기다리다 몇 마디 못하고 아쉬움을 가진 채 헤어지곤 했다. 마음을 물어본 적도, 얘기를 들을 여유도 없었다. 둘이는 국적이 다른 사람이 만난 것처럼 쳐다보며 배시시 웃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음이라는 기약도 없이.
나는 가끔 "우리가 사귀고 있는 것이 맞는 건가?" 라거나 "우리가 연인이라고 불리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사이를 사귄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던 연애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줄로 여기고 있었는데 불이 붙지는 않고 연기만 자욱한 것 같았다.
다음 날 둘이는 또 배시시 웃으며 탐라 다방에서 마주 앉았다. 이제는 제복 입고 앉아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이 익숙해졌고, 다방의 아가씨도 우리를 알아보아 친절한 미소를 띠며 차를 가져왔다. 아직도 나는 작은 요구르트를 빨대를 통해 단숨에 마시고 남자는 커피에 설탕을 타서 마셨다.
"오늘 휴무예요."
"그래요.?"
"왜 그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만나면 하려고 했죠."
굉장한 소식인 양 들떠서 얘기하는 나도 우스웠고 남자도 밝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대전 시내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옵시다."
"네."
다방 앞에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에 올라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의 좌석은 둘씩 앉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남자는 내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자 그제야 통로 쪽에 앉았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차창 밖으로 아직 새잎이 돋지 못한 키 큰 미루나무가 일정 간격으로 지나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는 새집이 대바구니처럼 달려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버스 유리창으로 반사되어 비치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대전 시내까지는 삼십분이 채 안 걸렸다. 시내는 우리가 만났던 동네 다방과는 분위기가 월등 달라 많은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쫓아갔다. 버스 정류장 주변에는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빌딩 밑의 도로를 따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노점상에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바닥에 골판지를 깔고 아무렇게 가격표를 써놓고 잡다한 것들을 파는 사람들, 지나가는 우리에게 둘이 잘 봐주겠다며 자리 깔고 손짓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정신없는 풍경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남자가 웃으며 잡아끌었다.
대로변을 벗어나니 주변이 한결 조용해졌다. 우선 점심을 먹자고 하고 식당을 찾았다.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둘이 나누는 대화는 늘 이렇게 간단명료하며 애매했다. 아무튼 늦은 점심때가 되었고 우선 밥을 먹는 일이 우선이었다. 남자는 바로 앞에 보이는 삼계탕집을 가리켰고 둘이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갔다. 종업원이 물을 가져왔다. 예의 바르고 조용한 연인이 삼계탕 두 개를 주문하고 큰일을 치르고 온 것처럼 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삼계탕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뚝배기에 바글바글 소리를 내며 끓고 있는 삼계탕을 식탁에 올려놓고 물러갔다.
"음, 맛있겠다. 많이 먹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뚝배기 안에는 털이 홀랑 벗겨진 조그만 닭 한 마리가 아직 가시지 않은 뚝배기의 열에 의해 바글거리며 같이 움직였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국물만 적셨다. 배는 고프지만 매끄럽게 벗겨내어 두 발이 묶인 채 통째로 누워있는 닭을 만질 수가 없었다. 이때까지 닭을 통째로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누워있는 닭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는 벌써 고기를 뜯어 식히면서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남자는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먹지는 않고 국물만 휘젓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남자는 내 뚝배기를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닭을 조각내어 옆에 있는 접시에 닭 다리 한 개를 올려주었다.
"뜨거운 모양인데 먹다 보면 식으니까 괜찮아."라고 하면서 뚝배기를 여자 앞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친절했다. 그제야 나는 고기를 발라 소금에 살짝 찍어 먹기 시작했다. 고기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뜨끈한 국물이 있는 밥을 먹으니 속이 편안하면서 몸도 노곤해져갔다. 남자는 공깃밥을 뚝배기에 쏟아붓고는 김치를 얹어 맛있게 먹는다. 잘 먹는 남자를 쳐다보며 여자 앞에서도 가리는 것 없는 식성 좋은 모습이 남자다워 보였다.
나는 이 남자와 밥을 먹을 때마다 매번 진땀을 흘려야 했으므로 밥을 먹을 때는 다소 긴장이 된다. 처음에는 매운 쫄면을 먹으면서 눈물 콧물을 흘리며 코푼 휴지를 쌓아야 했고, 지금은 통째로 끓는 물에 빠져있는 닭을 건져 먹느라고 진땀을 흘린다. 어쩌다 만나서는 먹어본 적이 없는 메뉴를 먹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니 아마도 다양한 식문화를 겪지 못하고 자란 내 환경 탓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 후부터 매운 쫄면도, 닭 한 마리가 맨몸으로 뚝배기에 드러누워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는 삼계탕도 잘 먹었으며, 곰탕에 밥 한 그릇을 말아 깍두기 국물을 붓고 깍둑 썬 김치를 얹어 먹는 남자의 모습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배가 부르자 둘이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느긋해졌다. 식당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많은 상가 건물 사이를 걸었다. 두더지 오락 게임을 하며 죄 없는 두더지 머리가 밖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망치로 내리치며 소리 내어 웃었다. 군인이니 사격은 잘 할 거라며 장총을 들고 사격하는 폼을 잡고 총을 쏘았다. 군인 보다 내가 점수를 더 잘 받았다. 전자기기에서 나오는 요란한 음악소리와 잡다한 기기에서 나오는 소음에 묻혀 둘이는 소리를 질러야만 소통이 가능했다. 모름지기 분위기 있는 데이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음에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어도 모처럼 둘이는 소리 내어 많이 웃었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상가를 벗어나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해는 기울어 갈 준비를 하는지 흐려진 날씨가 싸늘한 공기를 코끝에 전해오고 나란히 앉아있는 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졌다. 아직 전자기기 소음이 남아있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는 듯했지만 점점 사라져 갈 것이었다. 겨울을 지탱해 주느라 빛바랜 사철나무들이 길 안내하듯이 가지런히 산책길 따라 심겨있고 아직 싹을 못 틔운 잔가지가 앙상하게 뻗은 나무들이 키 작은 나무들 사이사이로 솟아올라 기둥처럼 보였다.
"눈이 내릴 것 같다."
"그러네요."
단지 그 말만을 했을 뿐인데 하늘에서 무게 없는 새털처럼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을 내밀어 받아보려고 했으나 얼마나 가벼운지 미처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둘이는 누구의 손에 먼저 닿는가 내기하듯 양손을 허공에 내밀며 웃었다. 참 유치해 보이는 장난을 하고 있음에도 둘이는 웃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발밑에까지 내리는 눈은 땅을 가리기 시작하며 하얗게 쌓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눈을 받기 시작하던 둘이는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내리는 눈을 가리며 걸었다.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여 버스정류장까지 도착한 둘이는 머리끝에서부터 쌓인 눈을 털어내면서도 서로에게 털어내지 못한 눈을 털어주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갑자기 내리는 눈으로 폭설 속에 달려가는 사람들이 설인처럼 보였다.
도착한 버스에는 먼저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버스기사는 차례로 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남자의 손에 등 떠밀려 버스 안에 들어와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끼어 대전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좌석이 생기기 시작했고 남자는 내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버스에 탈 수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앉자마자 둘이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들어 고개가 꺾인 채 서로의 머리가 맞대어졌다.
순간적으로 동시에 잠이 깼다. 부스스한 얼굴을 쳐다보며 하품하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잠깐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세상을 덮어버릴 수 있는 눈이 내리다니.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많은 것을 같이 한 날이었다. 많이 먹고, 많이 웃고, 많은 눈이 내렸다. 정류장에서 기분 좋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기숙사를 향하여 걸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쌓인 눈이 발목을 휘감아 걸음이 자유롭지 않았다.
기숙사로 돌아와서 젖어있는 옷은 말리기 위해 의자에 펼쳐놓았고, 젖은 구두는 벽에 세워놓고 말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후 이불속으로 들어가 같이 지낸 하루의 시간을 소형 영화관의 앞자리에 앉아 다시 돌려 보고 있었다.
새벽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동트기 전의 싸늘한 공기와 함께 하얗게 변한 세상을 보며 감탄했다. 이 꽃샘추위가 가면 곧 봄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가슴을 설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