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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Sep 11.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이별


기다리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때로 그 기다림은 목마름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신 창구가 병동인데, 걸려온 전화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멀리서 전화를 한 사람도 많이 기다려야 했고 받는 사람도 뛰어야 했다. 서로에게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한 열악한 환경을 그제야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서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니 어쩌다 만나면 늘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는 것처럼 반듯했다. 남자도 조용했고 나도 조용했다. 가끔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는 누나는 객지 생활하고 있는 우리가 안쓰럽다고  영숙이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해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잘 웃는 영숙이는 불편한 자리가 주는 어색함을 화기애애하게 좋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영숙이는 눈치가 빨라 초대받고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누나의 마음이 내게 있음을 꼬집어 말하기도 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나는 군대 간 남자를 기다리는 심정이라고 말하며 둘이 웃었다. 


시간은 꽤 많이 흘렀다. 가을이 지나면서 집에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보건소에 다니면서 적당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라고 채근했다. 나는 장녀인 까닭에 어찌 됐든 시집을 먼저 보내고 싶었던 부모님의 마음이 있었다. 때마침 다니고 있는 직장이 무료해질 무렵이기도 하고 남자의 목소리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일이 피곤함을 느껴가기 시작할 때였다. 아무튼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한 취업을 위해 서류를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내방으로 놀러 온 영숙이가 펼쳐놓은 서류를 보고는 이게 뭐냐고 소리 질렀다.


  "아직 결정된 거 아니야."


  "정말 갈래?"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영숙이는 속상해했고 그런 영숙이를 보면서 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장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작별의 순간이 올 것임을 예상하게 되었다. 영숙이와 나 사이에 서먹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떠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안도감에 영숙이는 단짝 친구가 곧 떠날 것이라는 섭섭함 때문이었다. 영숙이는 며칠 그러더니 곧 일상을 찾아 나와 더 자주 붙어 다니며 웃었다. 주변에서는 우리 같은 동기는 없을 거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가을이 짙어갈 무렵 나는 다방에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윤곽이 확실해 보이기는 해도 이제야 얼굴을 알아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가까워지지도 않고 늘 같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만난 횟수를 손가락으로 헤아려보며  둘이는 참 연애도 할 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주 보는 이 거리에서 한 발짝씩 나아가기가 그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나는 이제 이곳을 뜰 생각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급하지 않은 일이니 천천히 말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늘 저녁 누님 댁에서 식사하자고 하는데 같이 갑시다."


  "둘이서만요?"


  누님과 매형이 내게 너무나 친절하게 잘해주시는 줄은 알지만 혼자 가기가 어쩐지 불편한 마음에 영숙이를 불러서 같이 가자고 했다. 남자는 무리 없는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방 전화를 빌어 병원에 전화해서 영숙이를 불러내었다. 


  "오라고 해서 오기는 했지만 내가 끼어도 되는 거니?"


  "별말을 다하네."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남자는 조용히 웃었고 영숙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


  누님 내외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따뜻한 가정집의 식탁으로 대접해 주셨다. 누님과 동생, 매형의 사이가 따뜻한 공기가 흐르는 보기 드문 집안이었다. 


  내가 자랄 때 우리 집은 고부갈등으로 인한 큰 소리와 할머니의 박한 인심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밖으로 맴돌았고 어쩌다 보는 얼굴은 무섭게 엄격했다. 그런 환경으로 유년 시절을 보낸 탓에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노래 가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때가 되면 뛰쳐나가야 숨을 쉴 수가 있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저녁 식사 후에 누님은 과일을 준비해서 거실로 가져왔다. 남자의 어린 조카들과 함께 하고, 가족들의 화기가 넘쳐나는 웃음소리가 집안에 좋은 기운이 가득 차게 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출되는 장면이 내 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면 코가 비뚤어진 남자도 괜찮겠다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영숙이의 목소리가 좌중의 웃음소리를 거두면서 내 얼굴에 시선들이 꽂혔다.


  "얘는 곧 고향으로 간대요."


  "정말?"


  동시에 내 얼굴을 향해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들고 있던 사과 한 조각을 대충 씹어 삼켰다. 덜 씹은 사과 조각이 식도로 내려가는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객지 생활은 그만해도 된다고 집으로 오라네요."


  나는 좌중을 진정시키듯이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모여 앉은 식구들은 아쉬운 일이라는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누님과 매형은 답답해 보이는 동생과 나 사이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내가 떠난다는 조그만 사건에 대해 긴 얘기들은 하지 않았다. 대문까지 나와 인사를 나누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누님 댁과 이어져있는 조용한 긴 길을 걸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동안 영숙이가 하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영숙이를 불러내어 같이 가자고 했던 내가 갑자기 미련해 보였다.


    그날 이후로 본격적으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정식으로 간호과장 수녀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매 끼니마다 내 밥그릇을 살펴주던 주방 식구들에게도, 업무상 들락거리면서도 웃음을 놓지 않았던 약제실, 검사실, 원무과, 영상실 등등 가족같이 지냈던 식구들이었다. 야근 후 끼니를 거르지는 않는지 소리 없이 내 방문을 살피던 소녀 같던 사감 수녀님의 맑은 눈에 아쉬움의 눈물이 고였다.


  사철 초록과 눈 덮인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를 주던 자연환경이 나를 감상에 빠지게 하고, 주변의 선하고 친절한 동료와 수녀님들의 모습을 보며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유년 시절이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집안 어른들의 근면과 부지런함으로 궁핍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노동의 힘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어른들의 생활을 보고 자라 감상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했었다.


  태어나서 독립을 보장받고 이렇게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기숙사 창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볼 때마다 나는 황홀했다. 이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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