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희 Oct 02.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즉석사진


  공항 출구 쪽에서 공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007 가방을 들고 걸어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제복이 확실했다. 나는 조용히 미소를 띠고 서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맞는가?'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몇 초의 미소 뒤에 상대의 얼굴이 확실함을 알게 되자 그제야 반가운 표정을 짓게 되었다.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나는 갑자기 밀려오는 서러움을 삼켰다. 여름에 받았던 안부전화 한통으로 마음을 기대 가을을 맞이했다. 내가 겪는 이 상황을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전화기에 대고 하소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복잡하고 긴 시간이 걸리는 이곳에 남자는 거짓말처럼 나타나 내 눈앞에 서 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사람 없이 답답하고 힘들었던 시간을 남자의 조용한 미소로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공항을 빠져나가 어디서든 쉬어야 했다. 갈만한 데를 찾지도 못할뿐더러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는 것도 힘든 일이기에 우선 보건 진료소로 가서 쉬자고 했다. 내가 익숙한 곳이어서였다. 동생은 부모님이 계신 곳에 가 있기로 했다. 공항에서 진료소로 가는 버스편은 수월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허물어질 것 같은 진료소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을 갖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상대방도 마음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걸어가 진료소 마당 안에 들어섰다. 

  언제 지어졌는지 감도 오지 않는 흙으로 벽을 만들고, 마루로 통하는 나무판으로 만든 문짝이 오래되어 까맣게 그을려 보였다. 나무판으로 들어맞지 않은 여닫이 양쪽문은 열고 닫을 때마다 덜그럭거렸으며 의미 없이 대충 닫아놓았다. 우측 기둥에 세로로 '보건 진료소'라고 쓴 현판이 생뚱맞게 걸려있었다. 나중에 건물을 새로 짓게 될 거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말하는 나도 듣고 있는 남자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눈앞에 서있는 건물이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로 돌아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쪽문을 열어 방을 보여주고 남자는 고개를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와 벽을 기대고 나란히 앉았는데 방안이 동생과 같이 있을 때와는 달리 좁아 보였다. 기대앉은 등으로 울퉁불퉁한 벽의 느낌이 전해졌고 아침에 아궁이에 던져 넣은 장작 몇 개가 땐 불의 열기로 바닥을 대고 앉은 엉덩이를 따뜻하게 했다. 방안을 둘러보는데 180도 각도로 충분했다. 나는 커피를 타고 버터에 식빵을 구워낸 접시를 내었다. 한 잔의 차와 빵 한 조각으로 근사한 우리 집에 있는 여유를 느끼게 했다. 피곤할 테니 잠시 누우라고 베개를 꺼내주었다. 남자는 베개를 베고 허리와 다리를 쭉 뻗고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며 바닥에 누웠다. 

  "오래됐구나."

  "네."

  "흙냄새가 난다.'

  "네."

  몇 장 있는 디스크를 뒤적거리다 조르주무스타키를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부드럽고 가라앉은 목소리의 남자가 부르는 샹송이 손바닥만 한 방안에 구석구석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밖에는 늦가을 비가 소리 없이 부슬부슬 내렸다. 남자는 잠이 들었고 가볍게 코 고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좁은 방안에 나도 피곤했으므로 맞은편 벽 쪽으로 붙어 누워 다음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잠이 들었다.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래된 흙냄새가 피곤에 곯아떨어진 연인들의 몸을 이완시키며 숙면에 취하도록 뿌려주었다.

  반복되는 기계의 잡음 소리가 기분 좋은 잠에서 눈을 뜨게 했다. 시렁 위에 놓여있는 전축에서 디스크판을 그어대는 소리였다. 나는 턴테이블의 바늘을 제자리에 고정시키고 자리에 있던 베개를 시렁 위에 올려놓았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남자가 일어나 앉아서 짧게 자른 머리를 매만졌다. 

  "자고 나니 개운하네."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은 이번에 부모님 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왔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너무 멀어서 한번 다녀가기가 수월하지도 않고 해서,,,."

  나는 우리 집 현재의 상황을 조곤조곤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정리하면서 남의 과수원 집으로 옮겨갔다는 얘기며, 조급해진 부모님 성화에 맞선보러 자주 다니고 있다는 얘기며, 지금 이곳에 동생과 같이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서로 어떤 약속은 없었지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고도 했다. 남자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으니 오늘 저녁에 부모님을 찾아뵙자고 했다. 그러자고는 했지만 자고 나더니 조용한 사람이 적극적인 모습으로  달라 보였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흐린 가을 날씨가 해를 가려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부모님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전화를 드리고 버스를 탔는데 전화를 받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라앉게 들려 걱정스러웠다. 늦은 밤 예고 없이 들이닥쳐 부모님의 체면을 구기는 꼴이 된 것이다. 낯선 남자를 데리고 들어서는 딸을 어떻게 맞이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정류장에서 내려 부모님이 계신 집까지 몇 분 걸어가야 하는데 가로등 없는 비포장도로를 걸어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비 내린 밤에 어디가 물이 고인 웅덩이고 어디가 진흙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길을 초행인 남자와 함께 더듬어 가고 있었다. 신고 있는 신발이며 바지 밑단이 죽 같은 흙 속에 푹푹 파묻혔다. 

  집 안으로 들어서며 어머니를 불렀다. 하수구에 빠진 모습을 한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기겁하며 수건부터 꺼내오고 '양말 벗어라, 바지 걷어올려라' 하며 당황하여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남자는 어머니께 큰절을 올려드렸고 어머니는 체면이 구겨진 이 황망한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머니가 차를 내오고 잠시 후에 외출했던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자리에 앉지도 앉고 큰 소리로 야단부터 하셨다.

  "살다 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이렇게 마음대로 할 거면 지금 바로 나가서 결혼 날짜도 너희들 맘대로 잡고 와라."

  남자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여유 없어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못하고 올 수밖에 없었던 얘기를 차분하고 정중하게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가 안도하고 있음을 안다. 답답해 보였던 딸이 제복 입은 남자를 데리고 왔다. 처녀귀신은 면하겠구나 생각했을 것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쫓겨났다.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뒤따라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화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심했다. 아마도 이 남자는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사람은 처음 봤을지 모른다.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자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몹시 배가 고팠다.

  

  부모님을 찾아갔던 깜깜한 길과는 달리 시내는 네온사인 불빛이 우리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경양식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기 위해 물컵을 들고 우리에게 걸어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남자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돈가스"

  "여기 돈가스 두 개 주세요."

  경양식 집은 잘 꾸며진 실내장식과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으로 우리를 기분 좋게 했다. 좀 전에 부모님댁으로 오가며 받았던 수난이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어쨌든 돈가스는 황망한 신고식을 치르느라 마음으로 몸으로 허기진 연인들의 배를 채웠다. 남자도 한 단계를 끝냈고 나도 가릴 것 없이 다 보여주었으니 오히려 당당해진 마음에 잘 먹었다. 웨이터가 디저트로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배가 부른 연인은 여유롭고 급할 것 없어 보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커피잔을 손에 들고 남자가 물었다. 나는 이 질문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난감했다.

  "우리 결혼해요."

  내가 말했다. 남자는 잠시 쉬었다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내 위에 형님이 계시는데 조만간 결혼할 것 같은 얘기가 들려. 내 얘기를 먼저 하기에는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리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둘이는 밝게 웃었다.


  다음 날 화창한 날씨는 간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도록 가벼운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둔한 연인에게 망각의 힘은 대단했다. 연인은 밝은 마음으로 나들이 삼아 정방폭포로 갔다. 나는 서귀포에 있는 관광지 중에 정방폭포를 으뜸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계단이 가파르고 구불거렸으며 태초부터 있었을 것 같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우거져있었다. 큰 나무들 틈새로 보리수나무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와 오고 가는 계단을 더욱 좁아 보이게 만들었다. 밑으로 내려가서 폭포 쪽을 향해 걸어갔다.

  썰물 때라 검은 바위들이 드러나있는 저만치로 사방이 탁 트인 파란 바다가 보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강한 물줄기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위가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아마도 더 많은 물이 불었을 터였다. 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사진사가 다가왔다.

 "보기 좋은데 사진 한 장 남기시죠."

  사진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영업이든 아니든, 순간이 아쉬운 연인에게 사진사는 고맙게도 알아서 찾아와 주었다. 사진사가 앉아보라고 손으로 가리키는 검은색 큰 바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었고 사진사는 이리저리 각도를 맞추면서 사진을 찍었다. 바로 빼서 보여주는 즉석사진 속에 미소 띠며 다정하게 보이는 연인이 찍혔다. 그 사진은 약혼 사진이 되었다.


   





이전 11화 판포리로 가는 길 - 또 다른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