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왔다. 얼마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가족들은 반가웠다. 표정없이 무뚝뚝한 아버지의 얼굴에도 실같은 미소가 번졌다. 박스를 열어 준비해 온 가족들의 선물을 하나씩 펼치기 시직했다. 여동생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이rjt저것 만지작 거렸고 할머니는 애쓰게 벌어 뭐하러 돈쓰냐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손녀가 사온 윗저고리를 이리저리 펼쳐보고 있었다.
보건소로 접수된 서류가 통과되어 면접 일정이 잡혔다. 면접 날 동네 영선이 언니도 같이 있었는데, 언니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니다가 내려왔다고 했다. 면접이 끝나고 일주일 후부터 모자보건 센터로 출근하라는 전화 연락이 왔다. 모자보건센터는 우리나라의 가족계획 정책의 일환으로 새로 생긴 부서였다. 임산부의 산전 산후 관리와 함께 영유아 예방접종을 통해 영아 사망율을 예방하기위해 생겨난 부서였다. 새로 생긴 부서였기에 다들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할지 막막해 했다.
80년대는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국가정책으로 삼고 두자녀 갖기 위한 가족계획을 독려했다.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깊은 우리나라에 다자녀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전 직원이 가족계획사업에 매달렸다.
우리부서도 손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하에 관할 지역의 산모와 영유아가 있는 가정을 파악하는 일부터 하지고 팔 걷어부쳐 나섰다.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보건소 홍보하기도하고 산모인 경우 산부인과를 통해 산전진찰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서로 직접 방문하여 상담하는 산모가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모자보건센터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웃을 일이 없어졌다.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 어려움을 맞게 되자 저녁마다 어머니와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아버지는 전후사정을 얘기해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도 없었고 홀어머니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술담배에 의존했다. 가끔 빚쟁이 아줌머니가 사무실로 찾아와 나를 붙들고 울고 불고하다가 언제 갚을 수 있는가 확답을 요구하기도 했다. 나는 깊은 무덤속 같은 공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사무실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과 애처로운 시선도 같이 받았다.
부모님은 내가 장녀였기에 집인이 무너지기전에 적당한 사람을 짝지워 시집을 보내보려고 애를 쓰고, 집안의 가까운 친척들은 시집을 먼저 가야된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선 보는 자리로 등 떠밀려 나가 앉아 있어야 했다.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신상에 관해 얘기를 해야하는 이 상황이 나를 비참한 심정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조용한 남자에게서는 잊어버릴만 하면 전화가 오고 편지가 왔다. 멀리서 오가는 편지와 전화는 지금의 내 형편을 알길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무정했고 나는 여전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서는 무덤덤한 나의 모습에 시집가라는 성화도 그쳤다. 나는 내가 책임지는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우선 이 토굴같은 곳에서 빠져나가 숨을 쉬어 살아있어야 할 것이었다. 저녁만 되면 빚쟁이가 찾아와 부모님을 상대했고 빚쟁이가 돌아가면 고개숙인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는 울었다.
결국 아버지의 사업은 부도를 맞고 할아버지의 제사를 끝으로 아버지는 집정리를하고 남의 과수원에 있는 임시 지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집에 옮겨갔다. 할머니는 작은 아버지네 집으로 옮겨 살기로 했다. 옮겨간 곳에서 세상이 끝날것 같이 한숨을 쉬던 어머니도 살림을 정리하는라 눈코뜰새가 없었다. 새로 거처를 정한 집에서는 주변을 정리하느라 한시도 쉴틈이 없다보니 저녁 이른 시간이면 저녁밥상을 물리고 피곤한 몸이 쉬는 소리가 드르렁 거리며 들렸다.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도 했다. 평생을 남의 집에 살아 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구겨진 자존심을 내색하기에는 식구들 얼굴을 보기가 힘들것이기도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보건진료소는 아직 새로 짓기 전이라 어느농가의 허름한 흙벽돌 집으로 정해졌다. 집은 오래된 흙냄새가 났고 벽을 만지면 벽지사이로 훍이 떨어지는 소리가 우수수 소리가 들렸다. 마루를 방문객 진료실로 사용하고 옆에 붙어 있으면서 요를 하나 깔 수있는 조그만 방을 동생과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안채에 사는 주인 아주머니 아들이 나무를 해다가 겨우내 방안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보건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일년간의 교육을 마친후 나는 보건진료원이 되어 동생을 통학시킬 수 있는 지역에 배정 받았다.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동생은 성적이 좋아서 교대로 진학했다. 적성에 맞는지는 따져볼 여유도 없었다. 삼촌댁에 머물고 있던 동생을 불러 같이 지내기 시작했고 동생은 학교로 통학했다. 조그만 플라스틱 병에 모아놓은 동전을 차비로쓰고 도시락을 챙겨주면 버스시간에 맞추느라 부랴부랴 뛰어나갔다. 무너질 것 같은 이 허름한 집이 동생과 내게 비와 바람을 막아 평안한 잠자리를 제공해주었다. 어느정도 안정되어가면서 내가 떠난 후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도록 소액의 적금을 매달 부었다. 방학때마다 동생은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구해 뛰어 등록금에 보탰다. 언제까지나 동생옆에 내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육개월 할부로 조그만 전축을 구입했다. 전축은 흙이 무너져내린 울퉁불퉁한 시렁위에 올려놓았는데, 방안의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면서 또한 방안을 장식해 주는 호사스런 사치품이자 가난하지 않다는 우리의 자부심이었다.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동생은 샹송이나 분위기있는 노래를, 나는 가곡이 실려있는 디스크를 가끔씩 구입하여 틀어놓고 환자가 오면 볼륨을 아주 작게 줄이곤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머그잔에 커피를 타서 문살이 있는 쪽문을 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조류즈무스타키를 들었다. 턴테이블이 돌아갈때 성능좋은 스피커를 통해 좋은 음질의 음악을 듣고 있었으며 디스크를 갈아 끼울때 우리는 크고 화려한 거실에서 푹신하고 편안한 소파에 기대 앉아 감미로운 커피향에 취해 있었다.
어느 여름날 조용한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