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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Aug 28.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자전거를 타는 연인


  오늘 병동으로 전화가 왔다. 지난번 다방에서 잠깐 만나 얼굴을 봤던 남자다. 그때 인사하면서 헤어지고 얼마 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늘 시간이 괜찮으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다. 마침 주말이고 근무가 오전 근무라 저녁시간은 괜찮았다. 사람은 한두 번 보고 잘 모른다는 생각으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남자는 누나네 집에 와 있는데 시간에 맞춰 그때 그 다방 앞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얼떨결에 대답하고 나서 갑자기 헷갈렸다.


  "다방 안이라 했나, 다방 앞이라 했나?"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주변의 동료들은 데이트하냐며 놀려댔다.


  근무가 끝나고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가벼운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졌다. 캐비닛을 열어 얼마 전 영숙이와 같이 동네 양장점에서 맞춘 물방울무늬의 연두색 투피스를 꺼내 침대 위에 펼쳐보았다. 늦은 봄에 월급 타고 영숙이와 큰맘 먹고 한 벌씩 마련했는데, 여름이 시작되는 지금 입기에 좋은 계절이며 날씨였다. 


  적당히 약속시간에 맞춰서 지난번에 만났던 탐라 다방으로 걸어내려갔다. 그늘이 있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며 그때 만났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살랑거리며 다리에 휘감기는 부드러운 시폰 소재의 치마가 걸음을 가볍게 했다. 약속 장소에 다다르자 입구의 간판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갈 참으로 계단을 밟는 순간이었다.


  "여기요. 여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다방 맞은편 그늘진 곳에 자전거를 옆에 끼고 남자가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남자는 사복을 입고 있어 얼굴을 익히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남자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향해 자전거를 끌고 가까이 걸어왔다. 남자는 빛바랜 청바지와 간단한 티를 입고 있었으며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어서 못 알아봤어요."


  "그래요?"라고 하면서 남자는 웃었다. 소년처럼 웃었다.


  "마침 저녁시간이니 어디 가서 저녁 식사를 합시다. 뭐를 먹을까요?"


  사실 둘이는 이 좁은 곳에 남녀가 오붓하게 분위기를 잡고 앉아 먹을만한 식당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딱히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둘이는 저녁을 해결할 만한 곳을 찾아 걸어갔다. 자전거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절걱거리며 들렸다. 그제야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 생긴 자전거가 아닌 짐을 옮기는 뒷좌석이 큰 자전거였다. 


  더 이상 걸어가도 마땅한 곳이 없을 것 같은 동네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멸치육수의 냄새가 풍기는 쫄면집 앞에 멈추어 서서 더 이상 걸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맞아떨어졌다. 여름날 저녁 걸어오다 보니 멸치육수의 냄새가 시장기를 더욱 느끼게 했다.


  쫄면집 안에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소문난 집인 것으로 보였다. 나는 비빔 쫄면을 남자는 물쫄면을 시켰다. 물쫄면을 먹고 있는 남자는 한입 가득히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었다. 비빔 쫄면은 많이 매웠다. 차라리 물쫄면을 시켜야 했다는 걸 후회가 막심했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내가 생각 없이 비빔 졸면은 시켜놓고 눈물 콧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코를 풀어낸 휴지로 가득했고 폼은 있는 대로 구겨졌다.


  남자가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더니 해는 떨어져가고 남은 빛으로 인해 밝은 저녁이 되었다.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매운맛으로 인해 혀가 얼얼하여 상기된 얼굴을 식혀주었다. 곤욕을 치르며 먹은 매운 쫄면은 배가 고픈 중에도 맛있다는 느낌보다는 고통에 가까웠다. 자전거를 끌고 옆에 붙어 천천히 걸어가는 여자를 남자가 살짝 쳐다보고는 웃으면서 물었다.


  "많이 매웠어요?"

 

   "조금요."


  나는 약속 장소에 나오면서 새로 맞춘 옷을 입고 들뜬 기분을 안고 나왔는데 매운 쫄면을 먹는 바람에 스타일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창피해서 남자가 말을 걸어와도 길게 대답을 하기가 싫어졌다. 둘이는 말없이 읍내를 벗어나는 길을 걸었다. 눈치가 보인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전거 뒤에 앉아봐요. 많이 걸었으니 자전거를 타고 갑시다."  


  "이 자전거를요?"


  "네."


  "이건 짐 나르는 자전거죠?"


  "사람도 태워요."


  남자는 웃었다. 길 한쪽에 자전거 브레이크를 걸어 세워놓고 나를 뒤에 있는 의자에 앉을 수 있도록 부축했다. 남자는 자전거 브레이크를 풀고 몇 바퀴 움직이더니 핸들을 붙들고 재빨리 올라탔다. 자전거가 휘청하면서 짧은 비명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전거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중심을 잡고 짐대신 여자를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면 다칩니다."


  나는 운전자 의자를 잡고 있다가 남자의 허리벨트를 찾아 꽉 붙들었다. 떨어지면 큰일이다 싶기도 했고 솔직히 두발로 달리는 자전거가 무서웠다. 달리는 자전거는 여름날 저녁 바람을 일으켜 우리를 기분 좋게 했다. 나는 옆으로 두발을 모아 돌려 앉아 있었는데 발목까지 내려왔던 치마는 종아리를 보이며 바람에 날리고 뒤로 묶어 늘어뜨린 긴 머리가 뒤에서 날렸다. 포장이 안된 도로를 만나게 되자 남자는 잠시 쉬자고 했다. 







  둘이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몇 발짝 올라가 자전거를 세워두고 풀밭에  앉았다. 남자는 여자를 태우고 오느라 힘에 부쳤는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여름이 깊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가라앉은 적막함을 내가 소리치며 깼다.


  "아! 저기 보세요."라고 하며 남자의 어깨를 흔들어 손가락으로 멀리 가리켰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쳐다보았다. 멀리 미루나무 사이사이로 기차가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조용한 마을에 가끔 지나가는 기차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내 고향 제주에서 교통수단 중 유일하게 없는 것이 기차이고 보니 기차가 지나갈 때


마다 새로운 그림책을 펼쳐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또한 집에서 아주 멀리 떠나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차는 기다란 몸을 끌고 가면서 높은 음의 긴 소리를 냈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멈춰 선 연인이 새삼스러운 장면을 구경이라도 하듯이 기차가 지나간 자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켜 의미 없이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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