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로 가는 길'을 읽고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사진 이승원. 아르테. 2015
정여울 작가이자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간의 마음과 세상에 대한 끊이지 않은 호기심, 삶을 향한 아름다운 사색과 진중한 관심으로 문학과 삶, 인생과 자아, 여행과 감성, 사회와 성찰에 관한 글을 써왔다. 인문학과 여행의 절묘한 결합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은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눈부신 청춘의 가치와 고민을 그린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비롯해 인문, 문학 분야에서 꾸준히 책을 펴냈으며, 에세이 『마음의 서재』로 제13회 전숙희 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카이스트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으며, 다수의 신문 및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사진 이승원 작가. 저서 『나에겐 국경을 넘을 권리가 있다』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학교의 탄생』 『사라진 직업의 역사』 등이 있으며, 정여울 작가의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에 사진 작업을 함께했다.
읽게 된 동기
어느 날 헤세의 수필을 읽는 중, 글이 내게로 걸어오는 것 같은 묘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 책도 읽어보라며 딸이 건네주었다. 읽고 있던 책을 끝내고 책장을 넘기기시작했다. 헤세의 발자취를 그림과 같은 사진을 곁들여, 선뜻 가보기 어려운 곳을 여행하며 헤세의 이야기와 함께 보고 듣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프롤로그
우리는 추방당한 후에야 그곳이 낙원이었음을 깨닫는다.
헤세는 글을 쓰고 싶을 때는 글을 쓰고, 꽃과 나무가 그리울 때는 정원을 가꾸고, 날씨 좋은 날에는 산야를 헤매며 그림을 그리고, 방랑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때면 여행을 떠났다.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
헤세가 남긴 이야기 속으로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에필로그
헤르만 헤세에 관하여
헤르만 헤세는 부모님이 모두 선교사였던 1877년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칼프에서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소년은 신학교에 입학한 지 7개월 만에 학교에서 도망치고 자살까지 시도한다. 열네 살에 시인이 되기를 갈망했던 헤세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시계공장, 서점 등에서 일하며 시 창작에 몰두한다.
1898년, 헤르만 헤세는 릴케에게 인정받은 첫 번째 시집 『낭만적인 노래들(Romantische Lieder)』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Eine Stundehinter Mitternacht』을 출간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헤세는 평생에 걸쳐 꾸준히 시를 썼고, 서른 살 때는 "여기 시인 헤세 잠들다."라는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작성할 정도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초기에는 낭만주의적인 글을 썼던 헤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야만성과 불행했던 가정사, 동양 사상과 정신분석학자 융의 영향을 받아 '나'를 찾는 것을 삶의 목표로 내면의 길을 지향하며 현실과 대결하는 영혼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불혹에 접어들 무렵 시작한 그림은 세계와 자아를 섬세하고 풍부하게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작가로서의 헤세를 한층 성숙시켰다.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그린 3,000여 점의 수채화에서는 순수한 자아로 돌아가 꿈과 이상을 담으려 한 헤세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가정불화, 요양 등의 이유로 헤세는 1919년 스위스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로 이주해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몬타뇰라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헤세에게 비 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을 벗어나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헤세는 196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집필과 정원 가꾸기, 수채화 그리기에 몰두했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 화가로 살며 『패터 카멘친트(Petter Camenzind)』,『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크눌프(Knulp)』,『데미안(Demian)』,『나르치스와 골드문트(Narzi β und Goldmund』, 『유리알 유희(Glasperlenspiel)』 등 불멸의 작품들을 남긴 헤르만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데미안』은 60개가 넘는 언어로 전 세계에 번역되었으며 20세기에 가장 널리 읽힌 문학으로 꼽힌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고통을 느끼며, 행복을 맛보았던 헤세는 자신의 경험을 수필, 동화, 시, 등 다양한 장르의 글과 그림으로 옮겨두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다.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 손에 들려져 있었다는 작가의 말은 헤르만 헤세가 삶의 지표처럼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머나먼 나라의 작가'라는 거리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이니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알겠다. 뒤늦게 헤르만 헤세의 책을 손에 넣고 읽다 보니 전에 알지 못했던 글들이 살아 움직이는 같았다. 작가는 오직 헤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남겼다.
p11 '외적인 필요에 조종당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이끄는 충동대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초인의 삶, 일상과 예술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곧 예술이 되는 삶, 때로는 정열에 몸을 던져도 보고 때로는 방황에 몸을 던져도 보지만 결국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은둔하며 '세상의 시계'가 아니라 '내 마음의 시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 이것이 내가 꿈꾸는 삶이다.'
이상적인 삶, 꿈꾸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마는 그럼에도 가슴이 설렌다. 여행 중 생생한 사진을 곁들여 보는 재미를 더하여준 책으로, 굳이 앞서 나가지 않아도 헤세의 발자취를 따라 길안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고 생각했다.
1.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와 3.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를 사진과 헤세의 작품들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작품들의 글귀를 제목으로 하여 헤세의 추억이 깃든 여행지를 설명해 놓았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헤세가 하는 말을 옆에서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헤세의 여러 작품에 담긴 문장을 제목으로 하여 곁들여진 사진은 헤세의 책을 소환해 내어 다시 일고 싶은 충동도 같이 한다. 나도 아까운 문장을 놓치기 싫어서 제목을 필사하면서 내 곁에 잠깐이라도 머물러 주기를 원했다.
2. '헤세가 남긴 이야기 속으로'에서는 헤세의 작품에 관한 해설을 담아 과거에 읽었던 소설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주인공 한스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인 아버지와 교사들의 강압적인 훈육에 의해 빼앗겨버린 유년시절을 얘기한다.『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평생을 방황으로 일관한 한 청년과 그 방황을 말없이 지켜봐 준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를,『데미안』에서는 싱클레어의 이야기를,『싯다르타』에서는 싯다르타를 통하여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주었던 상처를 자식을 통해 깨닫게 된다. 책들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를 칼 융의 정신분석을 같이 다루며 과거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했다.
p154 융은 마음의 병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신신경증이란 궁극적으로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영혼의 고통이라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의미로 고통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면, 아픔은 제 갈 길을 찾기 마련이다. 고통받는 영혼은 방황하게 되어있다. 방황은 우리 영혼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꺾어놓을 때가 많다. 방황에 대한 본능적 공포는 시간을 마치 돈처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근대적 시간관념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나 모든 방황의 고통이 영혼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황도 있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나이 들수록 독자들의 반응에, 언론의 호들갑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더욱더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숲 속의 현자로 늙어가는 헤세의 무심함을 닮고 싶다고 하였다.
정신없이 분주한 이 시대에 고전이 주는 여유가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보태준다. 헤세가 지나가는 길을 작가와 함께 눈으로 마음으로 동행하며, 그림 같은 사진과 헤세의 그림을 함께 보는 재미와 매력을 누려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