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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Mar 19. 2024

아들이 돌아왔다( 2 )

아들의 간이식 수술을 위한 일정이 곧바로 잡혔다.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졌던 아들은 거므틱틱하게 변해갔다. 드러내 보이는 팔다리는 거칠고 푸석푸석하여 피부염처럼 부스럼이 생겨났다. 식도 정맥류 검사를 위해 내시경을 해야 했으므로 잦은 금식은 아들의 체구를 한 줌도 안 되게 만들었다. 딸에게 염치는 없으나 수술 일정이 잡혀 다행이라 생각했으며 감사했다. 일정대로 수술이 순조롭게 잘 끝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병약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우리 가족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문득 아들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 가족이 추억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술 후 관리가 시작되면 아무런 기회도 없을 것이고 혹여 거부반응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해외여행을 다녀오자는 엄마를 식구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미친 엄마가 아니고서야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곧 수술 날짜가 잡혔는데 해외여행을 다녀오자고 한다. 머뭇거리다가 남편이 말했다.

  "그냥 간단히 남해 정도 다녀오자."

  무식한 엄마는 수술 후에 거부반응이라도 나타난다면 그나마 기회가 없을 거라고 설득했다. 최고 빠른 일정을 찾아 캄보디아 얘기를 꺼냈다. 날짜와 시간이 수술 전에 다녀오기가 좋다고 해서였다. 병실에서 여행 얘기를 하고 있는 우리 가족은 지금 이 상황에 우리에게 나눌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 다들 헷갈려했지만 기분들은 들떠있었다.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되고 나니 앞뒤 돌아볼 필요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여권이 없는 막내는 곧 여권을 만들었고 우리 부부는 가족이 입을 단체 티며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체구가 작아진 아들을 위해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을 찾아다녔다. 큰 딸은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고 막내딸은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우리 가족이 각자 캐리어 하나씩 끌고 인천국제공항에 나타났다. 

  내일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 가족은 좋았다. 가이드의 안내로 여행 절차가 끝난 후 탑승 전 우리 가족은 다시없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슬처럼 손을 잡고 기도했다. 먹먹한 마음들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가깝거나 먼 미래를 알 수 있는 예지력이 있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우리 가족은 주어진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캄보디아에 도착했다. 패키지로 예약된 여행은 많은 인원이 아니어서 다섯 식수가 되는 우리 가족이 전세 낸 버스처럼 자유로웠다. 가이드는 우리 가족의 분위기를 잘 맞춰 주었고 일행들은 함께하는 우리 가족을 부러워했다.. 호텔에서의 아침식사도 기대보다 잘 나온 편이어서 먹성 좋은 우리 식구는 열심히 먹으면서 다녔다. 분위기에 어울려 아들의 표정도 밝았고 두 딸도 다른 젊은 여행객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어쩌다 보이는 외국인들과도 가벼운 인사를 하며 여행으로의 최적의 기분을 누렸다.

  정글에서 발견되었다는 캄보디아의 유적들은 잘 다듬어진 어느 나라의 근사한 여행지 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앙코르와트를 비롯하여 화려하고 위엄 있었을 유적들은 몰락한 지금의 나라를 대변했다. 영원하지 못한 영화와 영광이 보잘것없는 열대 우림 속에 갇혀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장구한 세월이 흘렀다. 당시에 지니고 누렸을 권력의  흔적이 한낱 비와 햇빛을 받고 자란 풀과 나무뿌리에 의해 덮쳐 볼품없게 만들어 버렸어도 비명 하나 없었다. 

  아들은 많이 걸어야 하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할 때는 버스에서 쉬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버스 유리창을 통해  눈으로 보는 관광을 했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가능한 푹 쉬면서 우리끼리 시간을 보냈다. 캄보디아에서 보내는 재미있고 행복한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수술실에는 큰딸이 먼저 들어가고 잠시 후에 아들이 들어갔다.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콧줄을 하고 스트레처카에 실려있는 딸이 먼저 나와 병실로 들어갔다. 자꾸 잠이 들려고 하는 딸을 깨우기 위해 남편과 나는 계속 말을 시켰다. 의사가 와서 몇 마디 시켜보고 이제 쉬어도 되겠다고 해서 애썼다는 말을 하고는 다독거려 재웠다.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이십 대의 딸에게 칼을 대게 했다. 아들 하나 살리겠다고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아들은 수술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날한시 아들과 딸을 동시에 수술실로 들여보냈다. 하나님이 우리에 많은 복을 주신 것을 알기도 하고 감사한 일이기도 하나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기를 여삼추로 기다리는 아들은 몇 시간째 소식이 없다가 저녁시간이 다 돼서야 중환자실 격리실로 옮겼다고 연락이 왔다. 

  중환자실로 아들을 보러 갔을 때 아들의 몸에 있는 구멍에는 각종 튜브를 연결해 놓았고 이런저런 종류의 수액과 혈액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수술 후 정리되지 못한 모습과 거무스레하고 칙칙하게 변한 얼굴은 눈뜨고 볼 수 없었으나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었다. 팔과 다리를 만지면서 우리가 있다고 확인시켜 눈인사를 하고 나왔다.

  다음날부터 아침저녁으로 규정된 시간에는 면회가 가능했다. 소독약으로 얼룩진 아들의 몸을 닦아주며 온몸을 다 합해도 한 줌거리라고 여겨졌다. 아침에는 눈가가 밝게 변해가더니 오후에 찾았을 때는 양쪽 뺨도 하얗게 변해갔으며 다음날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다니는 교회에서는 전 교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 겔 37:6


  비록 아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해도 어느 것인들 어떠한가. 살아난다고 했다. 아들의 얼굴부터 시작하여 몸뚱어리가 피가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중환자실로 면회 갈 때마다 몸에 꽂혀있던 튜브도 하나씩 제거되고 수액도 하나씩 줄어들면서 병실로 옮겨왔다. 아들과 딸은 옆 병실에 있었다. 남편은 딸의 빠른 회복을 위해 트레이너처럼 부지런히 운동을 시켰다. 복도에서 걷다가 오빠가 있는 병실로 와서는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남매는 빠른 회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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