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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Mar 12. 2024

아들이 돌아왔다( 1 )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작년 7월에 떠난 아들이 한 해를 넘겨 3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입원하여 시술을 위해 잦은 금식으로 몰골이 이티처럼 변해 있었다. 돌아온 아들은 우선 헬스장에 등록했다. 먹고 있는 내복약의 장복으로 인한 부작용 증상을 줄여보자고 한 것이다. 땀을 흘리면서 축적된 노폐물을 배설하여 조금씩 독소를 없애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약해진 체력도 키워야 했다.

  처음 헬스장에 다녀온 날은 손발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얀 피부를 지닌 아들은 만지기에도 병약해 보였다. 면전에서는 내색할 수 없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주고받았으나 어찌 서로 모를 수 있을까. 각자 지닌 염려와 근심을.

  십여 년 전에 아들은 큰 딸의 간을 이식받아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 

  입대를 위해 신검을 받은 후 날아온 건강 검진 결과가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모든 항목이 중증의 결과를 보여 아연실색했다. 부랴부랴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여 재검을 받았는데 PBCPrimary Biliary Cholangitis 원발성 담즙성 담관염)라고 진단을 내렸다. 희귀 질환이라 했다. 치료를 위한 특별한 처방은 따로 없다고 하면서 우루사 하나를 처방해 줬다. 일상을 유지하다 복수가 차면서 증상이 심해지면 간 이식을 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후로 우리는 시한폭탄을 짊어지게 되었다. 군에 가고 싶어 하던 아들은 군 입대가 좌절되면서 잠시 혼란이 왔다.

  휴학하고 생각을 정리해 보겠다던 아들은 다니던 학교를 일 년 휴학하여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일단 학교를 마치기로 했다. 

  나는 나쁜 엄마가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너무 좋은 엄마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직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아들이 짊어진 병이 내 탓으로만 여기면서 자책하고 스스로 학대하며 보냈다. 엄마가 되어 아들을 저렇게 되도록 두었으니 엄마는 모든 일에 힘들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온몸을 혹사하며 일했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학교를 졸업했다. 간 질환의 특성상 통증이 없기 때문에 진행이 많이 되어야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에게 마냥 취직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요리 자격증을 따보라고 권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구들장만 짊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아들은 레스토랑에 취직했다고 하면서 들어왔다. 서빙이 아니라 주방 요리사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동그랗게 눈만 굴렸다.

  "아니. 요리사 자격증을 따려면 학원에 등록해야지 어째서 레스토랑에 취직을 하니?"라고 물었다.

  "식당을 하는데 요리사 자격증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주방에서 요리를 하니?"

  "사장님이 칼질하는 걸 가르쳐 주셨어요."

  아들이 대답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다음날부터 아들은 레스토랑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의 특성상 정리하고 나면 늦게 끝나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 마지못해 시작하던 일이 어찌 된 일인지 그 일을 좋아하는 듯이 보였다. 생각나는 레시피가 있으면 장을 봐다가 집에서 조리하고 식구들에게 먹여 보기도 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하려고 하는 아들을 남편과 나는 오히려 대견해했다. 근사해 보이는 일이 아니어도 좋았다. 젊은 날 열심을 다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부모로서 더 바랄 게 없었다. 지점도 낼 예정이라며 가까운 지역에 책임자로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하면서 나름 요리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됐다. 

  어느 날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서 햄버거를 먹은 후 구토를 했는데 피를 토했다고 했다. 병원 갈 준비를 하라고 하고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입원 준비를 해서 응급실로 애를 데리고 당장 가라고 했다. 

  그때부터 아들의 병원생활이 시작됐다. 식도에서 혈관이 터지면서 계속 출혈이 됐고 혈액검사상 지독한 빈혈로 인해 수혈이 계속됐다. 집에 있을 때는 특별한 증상을 못 느끼던 얼굴이 병원에 있으니 그야말로 산송장처럼 보였다. 중환자실에서 응급으로 출혈되는 부분을 진정시키고 서울대학병원으로 다시 입원하여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듣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이제 간이식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누구의 간을 이식할 것인가? 식구들은 생각했다. 남편을 검사하니 지방간 증상이 있어 6개월 정도 운동하며 관리한 후에 MRI를 찍어 결과를 봐야 한다고 했다. 내가 공여자가 되어 아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그러나 나까지 누워버린다면 집안이 마비가 될 것이었다. 여하튼 장기 이식센터에 신청을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언제고 연락이 가면 수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당부를 했다. 아들은 집이 있는 청주로 내려와 근처 종합병원에 입원하여 날마다 영양제와 수액을 투여하며 동시에 장기 이식센터에서 연락 오기만 하면 달려갈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어느 날 새벽 3시경에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 받은 전화는 추락사한 60세의 남성분으로 앞의 순서인 분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음 차례가 될 거라고 했다. 우리는 우선 아들의 생명을 건져야 했으므로 지푸라기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우리는 차례가 된다면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는 답변을 보내고 결과를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여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여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우리 아들은 고작 25세였다. 60세가 된 어른의 간을 이식할 생각을 하니 그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장기를 받겠다고 승낙은 했지만 기도하기를 제발 앞의 순서 인분이 수여받기를 거절하지 않기를 바랐다. 초초한 시간이 흘러가고 두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앞의 분이 받아들여 수술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야 할까.

  말 없는 가운데 시간이 흘렀다. 아들은 식도 정맥류가 생겨 출혈의 위험이 있는지 계속 내시경을 하면서 위험 부분이 있는 곳은 시술을 시행했다. 

  며칠 후에 큰딸이 조용히 말하기를 본인이 검사하여 결과가 합당하면 공여자가 되겠다고 했다. 내가 말렸다.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몸에 칼자국을 남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딸은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이라며 검사하겠다고 나섰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딸을 데리고 검사받으러 서울로 향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식이 가능하다고 결과는 빨리 통보되었고 일정을 잡기 위해 다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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