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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Mar 26. 2024

아들이 돌아왔다( 3 )

  아들은 수술 후 빠른 회복을 보이면서 집안의 공기도 달라지게 했다. 푸석푸석하던 얼굴은 화색이 돌고 몸의 피부는 뽀얗게 변해가며 윤이 흘렀다. 아침마다 머리에 기름이 뜨고 있다며 아침저녁으로 수차례에 걸쳐 샤워를 했다.

  "내 간이 튼실해서 그래."

  딸의 농담 섞인  말은 우리 가족을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엄마인 나는 마음이 쓰라렸다. 

  딸의 몸에는 가능한 흉터를 적게 남기기 위한 봉합술을 시행했다고 하지만 길게 그어진 수술 자국은 보기가 힘들었다.


  스테로이드 복용은 주체할 수 없는 왕성한 식욕으로 쉴 새 없이 먹어댔다. 앙상한 뼈와 푸석푸석하고 검 으스름했던 아들의 모습은 갑자기 살이 올라 하얗고 오동통해져 갔다. 비정상으로 급격하게 살이 오른 모습이어도 엄마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기름졌다고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해대는 모습을 보며 수도요금 많이 나간다고 핀잔을 주지만 그래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수술 후 복부의 수술자국은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갔다.

  어쩌다 옷을 갈아입을 때 복부에 'L'자형의 커다란 칼자국은 숨을 멎게 했고 없어지지 않을 커다란 흉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원래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으나 불어난 몸을 보면 정상이든 비정상이든 엄마는 체격이 좋아졌다고 했다. 모정에 의한 공정하지 못한 시각임을 아들은 모르지 않았다. 아들은 헬스장에 등록해서 조금씩 운동을 시작했다. 건장한 체격도 아닌 비대해진 본인의 몸을 관리해야 함을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들은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지속했다. 조금씩 몸이 변해가기 시작하자 아들은 상반신을 거울을 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헬스장 트레이너는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을 찍어 변화되는 몸을 홍보용으로 활용했을 것인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생활에 자신감이 생기자 마냥 백수로 있을 수는 없는터라 취직해서 아침저녁 출퇴근을 시작했다. 아들은 다니고 있는 회사 직원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식구들을 회사 근처로 식구들을 불러 밥을 사기도 했다. 

  아들의 직장 생활은 활기 있어 보였지만 과중한 스트레스 또한 동반되어  몸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몇 년 다니던 회사를 사표 쓰고 나와 제주에서 자영업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일 년 정도 나름 레시피도 연구하고 메밀 집을 열었다. 아들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 서울로 다시 보냈다.


  아들은 다시 투병생활이 시작되었다. 복수도 빼고 이 검사 저 검사하고 전처럼 내시경 같은 잦은 시술로 인해 영상으로 보는 아들은 다시 앙상해졌다. 영상에서는 웃으며 걱정 말라고 하지만 말처럼 어디 걱정을 안 하고 아들을 바라볼 수가 있는가.

  가게는 임시 휴업하라는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제대로 배운 바 없는 모녀가 좌충우돌 꾸려갔다. 반죽이며 육수며 누워있는 아들에게 물어 물어가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며 익히기도 하면서 타 분야의 두 모녀가 식당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되려 깜짝 놀라던 모녀는 점점 익숙해져 가고 가게 내부를 가능한 예쁘게 만들려고 하고 손님들의 불편함을 들으면 시정하는 방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 번이라도 우리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행복해했고 그런 작은 일에 보람이 생겨갔다.  


  가게 주변의 동네 골목 정비 사업에도 우리가 나서서 깨끗하고 운치 있는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지나가던 마을 어른들이 말씀은 없어도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는 얘기도 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에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다. 우리 모녀는 지금까지는 수습 기간이었으나 앞으로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가게 사장은 투병 중이고 두 모녀는 열심히 가게를 만들어갔다.

  몸에 박힌 관도 빼고 청주에 있는 식구들과 지내면서 관리에 들어간 아들은 제주의 가게가 너무 걱정된 나머지 한번 다녀가겠다고 했을 때 당분간은 오지 말라고 했다. 차 있는 복수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 탈장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도 끝내고 회복한 후에 오라고 했다. 심한 탈장으로 배꼽이 주먹만 하게 튀어나왔고 수술 일정이 쉽게 잡히지 않아 애를 태웠다. 얼마 후에 일정이 잡혀 수술이 끝난 아들은 복대를 하고 영상통화를 시작했다. 


  사장인 아들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홀에 들어온 아들이 예쁘게 변한 가게를 보고 흐뭇해했다.

  아직은 몸이 정상이랄 수가 없어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헬스장을 출퇴근하듯이 다녀 땀을 흘리며 몸의 독소를 빼고 체력을 키우는 일을 우선으로 하자고 했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홀에는 나올 포지션이 안되므로 가능한 나오지 말라고 했지만 아들은 그동안 잃어버린 감각을 찾고 싶어 했다. 뜰채를 들고 휘젓고 나면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며 가느다란 종아리며 보고 있으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곧 떡 벌어진 어깨와 넘치는 힘을 과시할 것이다 


  집 마당에 벚꽃이 몽우리 져 필 준비를 하고 어떤 가지는 몇 송이 피어있다.

  십여 년 전 아들의 수술을 앞두고 뒤늦게 좇아가야 했던 내가 퇴근 후 회사 앞 도로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생각난다. 온통 화사한 꽃으로 뒤덮여 사람들이 부딪치며 다녀도 짜증 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 환한 얼굴이 벚꽃으로 뒤덮여 웃고 있었다. 해마다 벚꽃 철이 되면 환하게 웃을 수가 없었던 그때, 화사한 벚꽃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다가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들었었다.

  이틀 동안 많은 비가 내렸다. 작년까지는 가지를 많이 쳐서 벚꽃이 풍성하게 피지 못했다. 아마도 올해부터는 화사한 벚꽃을 환하게 웃음 지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다시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여 아들을 맞이했던 성경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죽을 고비에서 살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나도 잔치를 벌이겠다. 아들은 멋스럽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본인이 시작한 가게에 서 있기만 해도 어떤 인테리어의 소품과도 견줄 수 없는 상징이 될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 안에 점 같은 우리 인생에서도 다사다난, 우여곡절, 희로애락과 같은 사연 많은 시간들을 보내면서 호흡하며 살아있음에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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