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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Apr 02. 2024

긴 머리 소녀

  남편은 파마를 하지 않고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여자를 좋아한다.

  하얀 얼굴을 하고 있다면 더 좋은 일이고 몸매까지 쭈욱 빠져있다면 완벽하다. TV를 볼 때마다 예쁜 연예인이란 긴 머리를 하고 나온 여자를 꼽았다. 평생의 소원이 자기의 아내가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는 것이다.

  연애할 때 여자는 늘 긴 머리였다. 대부분의 결혼 전 여자들은 긴 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결혼하면 평생 찰랑 거리며 윤이 나는 아내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살게 되는 일은 당연지사였다. 

  연애하던 여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퇴근하면 따근한 밥을 해서 코앞에 대령해 주고 빳빳하게 세탁한 새 옷을 준비해 주는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더욱 행복하게 하는 것은 TV 앞에 나란히 앉아 아내의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일시적이며 오히려 고통이 오래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현재의 행복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 행복의 절정에 다다랐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쉴 시간이 없었다. 아기 목욕시키는 일에 같이 거들어야 하고 아기가 밤에 울기 시작하면 깊은 잠을 자지도 못했다. 아기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무등을 태워 다니면 아들과 아빠와 똑같이 생겨 '판박이'라는 말에 황홀해 했다. 아들과 같이 노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라고 했다.

  둘째가 태어났다. 

  남편은 집에 들어가기가 조금씩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큰애가 울면 작은 애도 울기 시작했다. 항상 정리가 잘 되어있던 집안은 애들의 장난감이며 물건들로 인해 쑥대밭으로 변해갔다. 막 자라는 큰애는 집안의 온 물건들을 헤집어 놓고 발 디딜 틈이 없게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형제는 용감했고 집안의 가구들을 성한 것 없이 만들었다. 더욱 못 견디게 만드는 건 아내의 긴 머리가 싹둑 잘려나가 귀를 드러낸 짧은 머리로 변한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은 현관문을 열고 둘째를 안고 나타난 아내를 보고 집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남편은 당황하여 허리를 굽실댔다. 

  "집 놔두고 어딜 가세요?"

  "아빠. 아빠!" 하고 등 뒤에서 아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본 남편은 아내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면서 휘청거렸다. 긴 머리였던 아내의 머리가 잘렸을 뿐인데 남편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내 머리가 잘리는 고통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남편은 아내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린 아들들을 남편이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아내는 치근덕거리며 남편을 쫓아다녔다. 남편이 참다가 소리 질렀다. 

  "그 긴 머리는 왜 자르고 그래. 누가 자르라고 했어."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자 아내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을 쳐다보았고 놀란 애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내 머리 내가 자르는데 왜 그래. 애들 보는 게 긴 머리가 힘들어서 잘랐어." 아내도 지지 않고 소리 질렀다. 부부는 서로 목청 높여 소리 지르고 애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끝내 아내도 애들과 같이 울기 시작했다. 애들은 엄마를 붙들고 같이 악을 쓰며 울어대고 아내도 서러워서 펑펑 울어댔다. 씩씩대던 남편이 수습불가인 이 상황을 어떻게든 풀어야 할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자 남편은 일자형의 입술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아내와 애들이 목놓아 울어도 남편이 달래주지 않자 순간 아내는 우리가 왜 울고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자기네끼리 놀고 있고 아내는 울음을 그치기도 힘들어졌다.

  "이제 그만해."

  남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이후로 아내는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어떤 때는 짧은 파마를 하고 들어올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쇼트커트를 하고 남편을 반기기도 했지만 내 머리 어떠냐는 아내의 물음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두 아들도 일찍 여자를 만나 분가했고 아내도 이제 환갑이 되었다. 탱탱했던 피부도 주름이 졌고 얼굴에는 드물게 옅은 검버섯이 보이기도 했다. 귀밑머리가 하얗게 새기 시작하여 염색을 하지 않고는 안되게 되었다. 어쩌다 염색을 하면 눈이 욱신거려 염색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주름진 얼굴에 하얀 머리가 길게 자라 다른 여자들 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애들이 자랄 때는 난리 북새통이던 집이 부부만 남아 조용하다. 

  조용한 집에 TV소리만이 들리고 남편은 어느샌가 아내의 긴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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