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희 Mar 05. 2024

부끄러움을 깨워드립니다

숙이는 새 학기가 되어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마냥 신이 났다.

5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이 생겼다. 숙이를 더욱 신이 나게 만든 일은 귀공자처럼 생긴 남자애와 같은 짝이 되어 맨 가운데 앞자리를 배정받은 것이다.

  "내게 이런 행운이 생길 줄이야." 

  숙이는 자면서도 귀공자 같은 남자애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꿈을 꾸느라 웃는 얼굴을 하고 잠이 들었다. 학교 가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등굣길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숙이는 거울을 볼 때마다 촌스러운 단발머리가 신경 쓰여 속상했다. 다른 여자애들처럼 긴 머리를 하고 찰랑거리며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머리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것 같으면 꼭 이발소에 데리고 가서 인정사정없이 단발머리로 쳐냈다. 머리를 감기기 성가시다는 이유에서다. 

  같은 동네 영희 엄마는 할머니처럼 보이는데도 영희 머리를 길게 기르게 하여 양 갈래로 땋아주었는데 공주 같은 그 모습이 정말 예쁘고 부러웠다. 이발소로 끌려갈 때마다 머리를 기르겠다고 완강히 거부해 보지만 엄마는 긴 머리채로 국을 끓일 것이냐 밥을 할 것이냐 하면서 판때기를 올려놓은 이발소 의자 위에 앉혀놓았다.

  맨 앞줄 가운데 앉은 왕자님 같은 짝꿍은 얼굴도 잘생겼고 말수도 별로 없었다. 언제나 조용했고 웃는 일도 거의 없었다. 숙제를 빠뜨리는 일도 없었고 준비물도 고급 진 것으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담임선생님은 여선생님이셨는데 은연중 짝꿍에게 관심을 보였다. 짝꿍 네 엄마의 안부를 묻기도 했고 가끔은 선생님 책상으로 불러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옆에 앉은 숙이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마음 놓고 말을 건네기가 점점 어려웠다. 옆 짝꿍은 하루 종일 있어도 숙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같은 책상을 반으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짝꿍은 저 멀리 있는 책상을 사용하고 있어 숙이의 목소리가 거기까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실없이 말이 많았던 숙이는 조금씩 말수가 없어졌다. 웃음도 사라져 갔다. 짝꿍은 예전 같지 않은 숙이를 가끔씩 쳐다보기 시작했다. 숙이가 가진 필통에 들어있는 문구 재료는 하나같이 부실했다. 싸구려 연필은 심이 계속 부러졌고 지우개는 글씨를 지울 때마다 종이가 찢어졌다. 

  "이걸로 써봐."

  짝꿍은 질 좋은 무구류가 가득한 필통을 열어 하얀 지우개를 건네며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활짝 웃으며 얼른 받아들었겠지만 무슨 영문인지 숙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를 붙들고 공책이 시커멓게 되도록 긁어대고 있었다. 짝꿍도 머쓱해졌다. 쉬는 시간에 숙이는 책상을 끌어 앉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능한 책상 한 귀퉁이로 옮겨 앉아 짝꿍에게 가까이하지 않도록 애를 썼다.

  

  집에서도 숙이는 말수가 적어졌고 짜증이 늘었다. 한 방에 할머니와 동생들이 함께 지내면서 복닥 거렸던 공간이 갑자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천정에 달린 전구를 놓고 불부터 끄라는 할머니의 성화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불 꺼라. 전기세 나간다." 

  " 불 꺼라 전기세 나간다. 그놈의 전기세, 전기세."

  숙이는 할머니의 말투를 흉내 내며 천정에 달린 전구의 스위치를 끄고 할머니와 같이 덮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이년아. 돈 아껴야지." 하면서 할머니는 숙이가 덮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러 올려주며 다독거렸다.

  창호지 문을 통해 달빛이 새어들어와 좁은 방안의 식구들의 모습을 비췄다. 옆에 두 동생은 대책 없는 모양으로 잠이 들어있었다. 할머니가 일어나서 끙끙거리며 동생들의 잠자리를 다시 봐주기 시작했다. 

  새벽잠이 없는 할머니는 빨리 일어나라고 이른 시간부터 달달 볶아댔다.

  " 가시나무에 매달아 놓아도 잠잘 년."이라며 숙이가 질끈 붙들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냈다. 

  숙이는 이제 학교 가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들고 다니는 책가방이 빛바래고 낡아 손잡이가 덜덜거리는 모양이 보기 싫었다. 엄마는 책가방도 많이 낡았다며 툴툴거리는 숙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말대꾸는 하면서도 명랑했던 숙이의 모습이 어딘가 달라졌다고 생각한 엄마는 학교부터 다녀오라고 달랬다.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집안의 궁색함이 구석구석 숙이의 눈에 들어왔다. 책가방을 들고나온 숙이는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책가방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갖다 버리겠노라고 다짐했다.

  쉬는 시간에 짝꿍이 숙이 쪽으로 하얀 새 지우개와 연필 한 자루를 들이밀었다. 오래되어 거무스레한 책상 위에 하얀 지우개와 고급스러운 연필 한 자루가 새 주인에게 인사하듯이 다소곳이 놓였다.

  "너 써. 난 또 있어."

  갑자기 숙이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숙이는 짝꿍이 내민 연필과 지우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짝꿍 쪽으로 도로 밀었다. 당황해하는 짝꿍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숙이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 거지 아니야."라며 숙이가 꼿꼿한 태도로 말했다. 짝꿍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때 같으면 고맙다면서 낚아채듯 가져갔을 테지만 숙이 자신도 무슨 심보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에 수업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렸다.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뒤따라 여자애가 들어왔다. 하얀 얼굴에 긴 머리를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머리핀으로 고정하고 무릎까지 오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공주처럼 생긴 여자애였다. 숙이는 살면서 이렇게 예쁜 여자애는 처음 보았다. 반 학생들의 입에서 짤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선생님이 소개를 했고 전학생은 은숙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은숙이가 어디 앉을까고 교실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선생님. 제 옆자리가 비었어요."라고 뒤쪽 창가 끝에 앉은 친구가 말했다. 

  "숙이가 저 뒤쪽으로 가고 은숙이가 그 자리에 앉아라."라며 선생님이 자리를 배정했다.

  날벼락 같은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에 로봇처럼 숙이가 가방을 꾸렸다. 짝꿍은 멍한 얼굴로 가방을 꾸리는 숙이를 바라보았다. 

  뒷자리로 옮겨간 숙이의 새 짝꿍은 거무스름한 얼굴과 까까머리에 우악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로 전학 온 여학생으로 인해서 피차 마음이 상한 상태로 만난 짝꿍은 서로 시큰둥한 얼굴이 되어 수업이 끝나도록 말이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숙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심정을 누구에게도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밥도 먹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 딸이 책가방을 새로 사주지 않아서 토라져 누워 있는 줄 생각했다. 선뜻 새로 사주지는 못하고 숙이 옆에서 곧 끊어질 것 같은 책가방 손잡이를 달아주느라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올해만 들고 다니면 내년에는 새로 사줄게." 

  엄마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들렸다. 엄마에게 책가방 때문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숙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침 등굣길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숙이 얼굴이 찌들어 보였다. 엄마가 뒤에서 다그쳤다.

  "내년에 새 책가방 사준다고 했잖아. 왜 빨리 안 가고 미적거려." 참다못한 엄마가 소리 내어 말했다. `재촉하는 엄마와 새로 만날 짝꿍을 생각하니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학교 가서 먼저 자리 잡고 앉아있을 생각으로 숙이는 뛰었다. 교실에는 숙이 혼자 있었다. 조금 있으니 먼저 짝꿍이 뒷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숙이에게로 다가왔다. 숙이 앞에 서서 가방을 뒤적거려 어제 돌려준 새 연필 한 자루와 하얗고 네모난 지우개를 놓고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제 숙이는 일부러 앞자리로 찾아가 돌려줄 용기는 없었다. 숙이는 네모난 지우개를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숙이가 가방을 팽개치고 부엌으로 가려다가 방 한구석에 새 책가방이 놓여 있는 걸 보게 됐다. 새 책가방은 반짝 반작 빛이 났다. 숙이는 가방을 들고 엄마를 불러 찾았다. 된장 항아리를 만지던 엄마가 왜 숨넘어가게 찾느냐며 모른 척 대꾸했다.

  "엄마. 가방이 반짝반짝하고 너무 예쁘다." 

  "맘에 드니?" 

  엄마 물음에 숙이는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가방을 열고 먼저 짝꿍에게 받은 하얀 지우개와 새 연필 한 자루를 집어넣었다.

  세월이 흘러 숙이도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애 둘을 낳고 살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상을 물리고 부부가 맥주 한 잔씩을 마시면서 옛날 얘기를 하게 되었다. 숙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왕자처럼 잘생긴 남자애와 짝꿍이 되었다가 새로 온 전학생 때문에 지질해 보이는 남자애와 짝꿍이 바뀐 얘기를 하게 되었다. 수치심으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나의 과거라고 말하자 남편이 말했다.

  "그렇게 깊은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네."라고 하면서 웃었다. 

  말해놓고 나니 살면서 가끔 체한 듯 답답했던 증상이 한 번에 쑥 내려간 것 같았다. 이런 소화제를 여태 구하지 못하고 이십 년 넘은 세월을 부끄럽게 여기며 보냈다. 

  때때로 나는 목에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실 마음에 깊이 상처기 되는 일은 대단하고 큰일이 아닐 때가 많다. 남편이 별일 아닌 일이라 하니 별일이 아니게 됐다. 그때 그 전학생과 짝꿍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 바가 없으나 그들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며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에 없을 것이다.

  "혹여 길을 가다가 우연히 스쳐지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기나 할까?" 

  맥주 한 잔이 숙이의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왕자님 같았던 그때의 짝꿍을 생각나게 했다. 

이전 15화 흐르는 눈물( 2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