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결혼이야기 3
20대에 첫 번째 남편에게서 벗어나는데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찬란해야 할 나의 20대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남편 폭력의 대부분의 이유는 의처증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도 한번 그렇게 믿으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또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두고 차마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시간을 견딜까?
처음엔 딴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뭔가 말을 시작하면 나에게 설명할 기회도 별로 주지 않고 분이 풀릴 때까지 말을 해야 되는 사람이라 그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즐겨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좋아했던 음악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뭔가 이 상황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 볼 때보다는 꽤 괜찮았습니다.
의처증이 심하니 밖에도 못 나가고 친구도 못 만나고 그저 장 보러 가거나 유모차를 끌고 동네 산책 정도가 외출의 전부였습니다.
친정에 가는 것도 싫어해서 친정도 거의 가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나 싶겠지만 진짜 그렇게 감옥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잠들어있을 때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평상시 보지도 않던 EBS채널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기초 일본어 강의였는데 히라가나부터 알려주고 있더라고요.
그때 저는 히라가나, 가타카나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우에오부터 시작했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아이가 잠들어 있을 시간에 매일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는 단어 3개만 외우자 했습니다.
아이랑 놀아줄 때, 집안일할 때 조금씩 늘려가면서 단어도 외우고 기초일본어 문법도 공부했습니다.
전보다 밖에 더 안 나가니 남편의 의심도 줄어들고 폭행의 횟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어차피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면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학생들처럼 공부할 수는 없었기에 특별한 욕심도 없었습니다.
일본인과 대화하고 싶다, 일본어로 된 책을 읽고 싶다 머 그런 건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그냥 이렇게라도 폭행이 줄어든 게 기뻤을 뿐입니다.
일본어공부는 공부가 목적이 아니라 시간 때우기였습니다.
다** 에서 나온 기초일본어였는데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처음 나온 말이
私は明るくて活発な性格です
였습니다.
저는 밝고 활발한 성격입니다 란 뜻인데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나의 이런 성격은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으니까요.
어느 날 문제풀이를 하는데 정답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난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해하다가 문득 다** 출판사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했고 아주 친절히 오타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냥 그 사실을 알려주고 전화를 끊어도 됐을 텐데 그분은 조심스럽게 일본어 능력시험을 준비 중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그게 먼지도 몰랐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친절하게 이 질문에 대한 오답을 찾아낼 정도면 3급 정도 수준이 될 듯한데 준비를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해 주었습니다.
남들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니 20년이 넘었네요.
그사이 저는 1급까지 땄고 일본친구들과의 모임에도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배신해도 공부는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마치 증명해 낸 기분입니다.
물론 정말 일본어를 잘 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독학이다 보니 형편없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저는 아주 만족합니다.
고통을 견디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일본어가 폭력을 견디게 해 주었고, 절망 속에서 허덕이던 나에게 휴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공부가 되냐고 묻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밖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