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나”는 지인 A입니다.
영화 “파묘”가 한참 인기가 있었던 때였다. 이혼 이후 같이 영화 보러 갈 사람이 없어서 유명한 영화도 집에서 OTT로 보던 나였지만 왠지 파묘만큼은 누군가와 같이 보러 가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이미 남편이랑 봤단다. 같이 영화 보러 갈 남자친구가 없는 나 자신이 문득 초라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과 소개팅할 생각이 없냐는 연락이 왔다. 아이도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소개팅이라는 걸 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여자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다른 아픔이긴 하지만 아픔이 있는 사람과 만나서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사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혼하고 처음 하는 소개팅에 나오는 남자는 전혀 나의 이상형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프가 바람 펴서 이혼을 했다는 그의 사연은 그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는 몹쓸 착한병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청소, 요리, 세탁등의 모든 집안일을 혼자서 척척 처리해 가면서 씩씩하게 사는 모습은 그 착한병을 다시 한 번 더 자극하고야 말았다. 마치 내가 이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을까? 자신의 집 관리비가 한 달에 백만 원 넘게 나온다던지, 여행을 갈 땐 캐리어는 리**을 들어야 된다던지, 커피는 적어도 이 브랜드의 커피를 마셔야 된다던지 자신이 어느 정도의 부를 가지고 있는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다**에어랩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딸 주려고 다** 에어랩을 사두었다고 했다. 딸을 생각하는 아빠로서의 그는 멋진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에어랩을 사두었는데 집에 놀러 온 후배가 에어랩을 보고 후배가 빌려달라고 했단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고 물었더니
“후배가 빌려달라길래 빌려줬어.”
“에어랩을 어디다 뒀었는데 후배가 보고 빌려달래?”
“안방 파우더룸에.”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아무 말하지 말았어야 됐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이상해서 물어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딸 주려고 사두었던 에어랩을 안방 파우더룸에 두었는데 집에 놀러 온 후배가 그 에어랩을 보고 빌려달라고 했다고? 에어랩을 빌려달라고 했다면 여자겠네.”
남자 후배라면 에어랩을 쓰지 않으니 빌려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에어랩 같은 소형가전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빌려달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만 남자 선배의 집에 놀러 와서 혼자 사는 남자의 안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이상했다.
“오빠. 이상해. 딸 주려고 사놓은 에어랩을 빌려달라는 후배도 이상하고, 그걸 빌려주는 오빠도 이상해.”
이상할 게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길래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며칠 후 집에 놀러 갔더니 안방 파우더룸에 에어랩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빠 이 에어랩은 뭐야?”
“응, 너 쓰라고 샀어.”
“난 에어랩 안 쓰는데?”
이때도 이상했다. 난 에어랩을 쓴다고 말한 적도 사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마치 그때 이상하다고 한 내 말이 에어랩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보여졌다는 듯이 말을 한다.
내가 자주 놀러오는 것도 아니고 그집에서 에어랩을 쓸 일은 더더욱 없는데...
“나 줄려고 샀으면 집에 갖다 놓고 써도 돼?”
그렇게 나는 에어랩을 빌려간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는 다**에어랩을 빌려준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전에 빌려갔다던 후배도 사실은 이렇게 빌려간 사람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줬던 에어랩도 빌려간 걸 돌려받아서 준 것이었을까? 날 위해 샀다면 종이박스 채로 줄 거 같은데 박스 안에 있지 않았던 이유도 빌려줬다가 받은 것이었을까? 딸 위해서 샀으면 딸을 줘야지 그 누군가에게 빌려준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이런 소모품의 가전을 빌려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 에어랩은 도대체 몇 번을 거쳐서 내게 온 것이었을까?
그래. 또 다음에 만날 사람에게 줘야 될 테니 돌려줄게. 그러다 또 헤어지면 빌려줬다고 우기면서 돌려받아야지. 별것도 아닌 에어랩 가지고 그렇게 줬다 뺏고 하면서 살아. 네 수준이 딱 그 정도구나~~~~
그리고 나는
"이게 당신 스스로 증명한 당신의 수준입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라고 카톡을 남기고 그를 차단했다. 60이 다 되어 오는 남자가 에어랩으로 돌려막기를 하다니....
근데 이쯤되니 궁금해진다. 다** 에어랩이 그렇게 대단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