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이젠 더 이상 습하지 않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사택의 여름은 상당히 습했다. 이불은 늘 축축했고, 비가 쏟아져 창문을 닫고 외출한 날이면 집 안의 신발과 청바지, 셔츠, 바람막이 등에는 곰팡이가 펴있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습하지 않다. 가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2. 나는 가을이 좋다. 구석구석 엉겨있는 낙엽이 좋다. 그 낙엽을 밟는 내 발도 좋다. 내 발을 감싸고 있는 갈색 신발도 좋다.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도 좋다. 가을 저녁의 스산함이 좋다. 조금은 외로울지도 모르지만, 깊은 가을밤이 좋다. 쌀쌀하지만 동시에 따뜻하기도 하다. 가을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가을이 지닌 색감이다. 은행잎의 노란색, 낙엽의 갈색, 단풍잎의 붉은색, 갖가지 나무색들의 옷. 괜스레 센치해진다. 가을 남자가 된 것만 같다.
3. 영화 만추를 좋아한다. 늦은 가을이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만추의 포스터에는 현빈과 탕웨이가 나란히 길을 가고 있다. 녹색 코트를 입은 현빈과 옅은 갈색의 트렌치 코트를 입은 탕웨이. 안개가 가득한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여운이 짙은 영화이다. 마지막 장면은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허공을 바라보는 무심한 표정의 탕웨이가 그들의 약속처럼 현빈을 기다리는지, 아니면 그저 추억하는 것인지 알게 무엇인가.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늦은 가을의 감정은 폭발하는 것이 아니다. 가득차서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이다. 은은하게 감정이 퍼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차분하게, 그리고 어쩌면 처연하게.
4. 나는 가을밤에 산책을 자주 나선다. 은근한 고독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고독은 더 이상 피하고 싶은 녀석이 아니다. 친구가 된 지 오래다. 매년 가을엔, 이 친구가 나를 찾아온다. 다른이와 섞이지 못해 오는 외로움이 아니다. 나 자신을 한 발 떨어져 관찰하는 고독이다. 내가 나 자신과 합치되지 못할 때 고독을 느낀다. 그럴 때일수록, 나 스스로를 조금 더 잘 알게 된다. 그래서 싫지 않다. 내 고독은 가을빛이다.
5. 작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운 채, 상념에 잠기고 싶다. 죽여주는 분위기였다. 와인과 함께 단풍을 닮은 주백색 조명을 벗 삼아 취한 적이 있었다. 작년 가을이었다. 올해도 나는 그 모닥불과, 와인과, 조명을 기대하고 있다.
6. 사계절 내내 여름인 나라도 있다. 사계절 내내 겨울인 나라도 있다. 사계절 내내 가을인 곳이 있다면 난 그 곳에 가서 1년 4번의 가을을 보내보는 것이 내 작은 바램이다. 나 자신과 한층 가까워지는 계절, 가을이 질릴 때까지 가을을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