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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도원 Apr 18. 2024

은닉할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은닉>을 읽고


책 제목: 은닉

지은이: 배명훈

출판사: 북하우스

출판일: 2012.06.25


요새 시간 날 때마다 배명훈 작가 책을 재독 중입니다. 제가 이 작가님을 참 좋아하긴 하는데, 작품에 대해서는 늘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배명훈의 작품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신의궤도>가 1위, <타워>가 2위이며 그 외의 작품은 모두 그놈이 그놈이다"

근데 최근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건 그놈이 그놈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새 책을 많이 읽어서 좀 더 많은 게 보이는 걸까요? 사실 그보다는 높은 확률로 당시에 책을 졸면서 대충 읽어서 그럴 겁니다. 특히 이 책은 2015년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의 제 평가를 되짚어보면 대충 "분위기랑 색감은 좋은데 급전개를 버틸 수가 없다."였습니다. 다시 읽으니 평이 좀 많이 달라지네요. 호불호가 굉장히 많이 갈릴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은 여전하지만, 굉장히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은닉>은 첩보물입니다. 연방 소속의 킬러인 주인공은 11년 주기로 찾아오는 안식년에 체코에서 무언가를 보고 오라는 지령을 받습니다. 거기서 옛 동창이자, 숙청된 권력자의 딸 김은경을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내려진 임무는 "김은경이 다시 연방의 위협 요소가 될 것인가?"를 판단하고 처리하는 것. 주인공은 평생의 사랑이었던 은경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조직을 향해 칼날을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파트너, 정보분석가 조은수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은밀하게 드러나는 마음
카를로비 바리에서 우리가 주고받은 말이 떠올랐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 알 수도 없는, 어쩌면 그걸 굳이 따질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두 사람 모두에게 간절했던 그 말.
"너랑 이렇게 나란히 걷고 싶었어."
"나도."
은수의 시선이 좀 더 아래쪽을 향했다. 눈물 말고는 더 떨어질 게 없는 곳.
-p201

대놓고 보이는 이 책의 강점은 분위기와 색감입니다. 첩보물이라는 소재, 눈발이 흩날리는 쌀쌀한 체코의 겨울이라는 배경, 검은색과 흰색으로 표현되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그리고 "안갯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상황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야기 전개.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전반적으로 굉장히 차분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 작가님의 특징이라면 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수준으로 담백하다는 점인데, 이 책에서는 이러한 감정 묘사가 전반적인 분위기 형성에 또 한몫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위에서 제가 느낀 이 책의 가장 재밌는 포인트는 그 속에서 아주 살짝 드러나는 각 인물들의 감정선이었습니다. 책 제목인 <은닉>처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정보를 숨기고 의심합니다. 하지만 책의 부제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이 가진 마음은 숨겨지지 않습니다. 나의 행동 동기는 결국 은경에 대한 마음이었고, 그런 나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은수, 그리고 은수를 의심하면서도 믿고 행동하는 나의 모습에서 그런 면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각 인물이 가진 마음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차갑고 어두운 작품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 건조한 문체로 툭 던져질 때 아이러니하게도 굉장히 그 감정선이 굉장히 절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마치 아주 어두운 방에서는 약한 불빛도 굉장히 밝게 느껴지는 것처럼요. 제가 원래 혼자 책 읽을 때 책 구절 필사를 잘 안 하는데, 이번엔 생각보다 그런 감정묘사에서 짠해진 포인트가 많아서 이번엔 유난히 필사를 많이 했네요.


속도감을 위한 장치냐, 완급 조절에 실패한 급전개냐

이 책의 전개 속도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이런 사건 전개 위주의 첩보물이 긴장감을 위해 전개 속도가 빠른 편인데, 이 작품은 유난히 더 그렇습니다. 특히나 작품의 진행속도에 비해 많은 정보가 생략되어 있어서, 잠깐 정신을 놓으면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이번에 읽을 때는 오히려 이런 부분이 이야기의 속도감을 더해주는 장치로 느껴졌는데, 그래도 과거의 저를 포함 대부분 가장 불호라고 느끼는 부분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써보고자 합니다.


우선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의 제목이 <은닉>인 만큼 작품의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이 어떤 것을 의심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가?"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의 부재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나타납니다. 이 책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선 각 인물들이 속한 소속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많은 부분이 그냥 회상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한번 멈춰서 정리하지 않으면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요.


다양한 SF적 소재들의 등장도 이를 부추깁니다. 물론 이번 작에서도 배명훈 작가 특유의 신선한 소재들은 작품의 매력을 살려줍니다. 특히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가 인물의 취향을 모방하여 행동하는 디코이를 활용한 정보전인데, 이 부분이 굉장히 참신하고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품 내의 요소들이 하나하나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가지는데 비해, 각각에 할당된 분량이 너무 적은 것 같아요. 작품 내 인물 간의 관계도 파악해야 하는데 추가로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도 파악해야 하니 안 그래도 적은 분량이 더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이게 가장 극단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작품의 최종장입니다. 특히나 여기서 드러나는 진짜 전략무기 "다섯 개의 이름을 가진 악마"는 이전에 나온 다른 소재들과 비교했을 때 그 묘사가 정말 과하게 은유적이라 독자에게 추상적인 상상의 영역으로 집어던진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심지어 이 부분은 사건 전개도 앞장보다 더 빨라져서 급전개로 느껴질 여지가 큽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 책이 도합 300페이지인데, 클라이맥스의 시작이 210페이지, 악마의 진짜 실체가 나오는 부분이 250페이지, 사건이 한번 더 꺾이는 부분이 270페이지, 그리고 그 사건이 대략 10페이지 내외로 마무리가 됩니다.


물론 이러한 면은 시각을 달리하면 이 책의 큰 매력포인트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작품에서도 외력으로 인해 점차 사건의 중심에 빨려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점차 급격하게 기울어가는 체스판 위의 기물로 묘사하는데, 점점 가속화되는 이야기의 흐름에 탄 독자도 중심에 급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명훈 월드의 인물들, 그리고 조은수
"처음부터 말했잖아. 반만 믿으면 충분하다고. 나에 대한 신뢰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너한테 나는 최우선이 아닐 테니까. 그런 건 괜찮아. 신경도 안 써. 하지만 진짜로 화가 나는 게 뭔지 아냐? 네가 나를 이렇게 묶어뒀다는 거야. 이럴 줄은 몰랐다. 봤잖아, 그 상처. 내가 겪은 일을 조금이라도 마음 아파했다면 이렇게 내 손발을 묶어둘 수는 없었을 거다. 못 믿겠으면 차라리 그냥 없애버리지 그랬어? 그게 네 직업이잖아. 다시 눈뜨지 못해도 상관없었어. 그게 마지막이어도 괜찮았다고. 마지막으로 본 게 너였으니까. 그런데 이게 뭐야? 내가 꼭 이 꼴을 하고 정신이 들었어야 하는 거냐? 이건 진짜... 죽었으면 죽었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고."

- p200

이 작품을 읽으며 특히 조은수라는 캐릭터에 정이 많이 들었네요. 배명훈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특정 이름의 인물이 꽤나 자주 나온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김은경"이라는 여성이고, 이번 작의 핵심 인물인 "조은수" 또한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이름만을 공유하는 모두 다른 인물이지만, 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마치 본질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각 작품의 성격이 다른 배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게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두 인물이 모두 나와서 사건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는 <고고심령학자>라는 책인데 그건 차후에 기회가 되면 얘기해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무튼 개인적 감상으로 김은경이 그녀의 대표작인 <신의궤도>에서도 그렇고, 이번작에서도 그렇고 늘 넘치는 생명력을 지닌 빛과 같은 "상징"으로서 중요한 존재라면, 조은수는 그림자에 가깝지만 실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좀 더 차갑고 이지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인데, 이런 캐릭터가 감정을 드러낼 때의 그 대비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 책에서는 조은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주인공뿐 아니라 독자들도 "은수는 선역인가? 애초에 실존하고 있는 인물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게 돼서 그런지, 그녀의 진심이 나오는 장면과 주인공이 마지막에서야 그것을 깨닫고 모든 의심을 거두는 장면이 너무 슬프고 짠했네요.


<신의궤도>가 김은경의 김은경을 위한 작품이라면, <은닉>은 조은수라는 배우를 위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공의 목표 (김은경)도 아니지만, 이 이야기 전체를 견인해 갑니다. 특히 이 작품에선 전반적인 분위기와 앞서 말한 조은수라는 인물의 본질이 굉장히 잘 맞아떨어져서 그런지 매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네요. 앞으로도 배명훈 소설에서 많이 보고 싶은 캐릭터입니다.


결과적으로 웰메이드

결과적으로 거의 10년 만에 다시 만난 <은닉>은 불호가 거의 없는 책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장편의 기준은 "책을 덮고 여운이 얼마나 남는가?"인데, 그 여운은 확실하네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신의궤도>처럼 두 편으로 빵빵하게 썼어도 됐지 않았나 싶은데... 이건 그냥 책이 재밌어서 나온 개인적인 욕심이고요. 이전에는 불호에 가까웠던 책의 평이 이렇게 바뀌다니 참 기분이 묘하네요. 이전에 작품에서 불호로 느꼈던 부분이 오히려 문학적 장치로 느껴져서 책의 굉장한 매력포인트로 바뀐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전의 발언을 정정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배명훈의 작품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신의궤도>가 1위, <은닉>이 2위이며 <타워>는 3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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