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지갑에는 천 원짜리 새 돈 몇 장이 비상금처럼 들어 있었다. 요즘이야 천 원짜리 한 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수십 년 전에 천 원이면 간단한 요깃거리를 살 수도 있고, 지하철이나 버스도 탈 수 있었으니, 천 원 한 장이 비상금의자리를 차지할 만했다.
하루에 천 원 몇 장을 써 버린다고 생활에 타격이 올 만큼 그 사람은 가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돈을 일수꾼이 명함 날리듯 흥청망청 쓰는 부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비상금은 좀 남달랐다. 자기의 위급한 상황을 위해 준비해 두는 게 아니라, 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꺼내주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오직 그를 향해 자선을 청하는 사람을 위한, '준비된 후원금'이었다고 할까.
옛날에는 구걸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이를 테면, 지하철에 올라 껌과 그 껌을 사줘야 하는 자신의 사연을 적은 종이를 앉아 있는 사람들의 무릎에 돌리고 가는 사람, 시장판에서 다리 대신 고무 타이어를 밀고 다니며 구걸하던 사람,버스에 올라 "어릴 적 조실부모 하고~"로 시작하여 "한 푼만 도와주시면 앞으로 바르게 잘 살아 보겠다"로 끝나는 대사를 외우고 손을 벌리는 사람들. 대다수의 승객들은 그런 사람들과 되도록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고, 피해갈 수 있으면 피해서 갔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타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지갑을 꺼내, 예의 그 비상금을 꺼내 전달했다. 그렇게 비고 나면 다시 다른 새 돈을 그 자리에 채워 넣었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둘레에는 늘 비판과 우려를 앞세우는 친구가 있었다. 낮에는 고무 타이어를 끌고 다녀도 밤에는 외제 승용차를 탄다더라, 앞에 내세우는 앵벌이 아이들 뒤에 폭력조직이 있다더라,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자립할 생각을 오히려 안 한다더라, 하는 말로 친구의 행동을 마뜩잖게 보았다.
그래도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돈을 어떻게 쓰든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며, 나는 그저 내 돈을 내 방식대로 쓸 뿐"이라는 논리였다. 아울러 구걸을 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헌 돈, 찢어진 돈, 구겨진 돈을 골라 줄 필요가 있는가, 기왕에 줄 거면 폼나게 새 돈을 준비했다가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헌 돈부터 골라 쓰면 늘 헌 돈만 쓰는 거고, 새 돈부터 골라 쓰면 늘 새 돈만 쓰는 거라고도.
그에게 '새 돈'의 의미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모습으로 남들 앞에 손을 내미는 그들을 향한 응원이고, 같은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존중이었던 것 같다.
착한 일을 하거나 걸인을 돕는 행위를 적선(積善)한다고 한다. 폐지를 수거해 마련한 수천 만원 또는 억대의 거액을 후원하거나, 해마다 익명으로 봉투를 두고 가는 훌륭한 사람들과 대비해 보면 그깟 천 원 비상금의 후원은 정말 아주 작은 선행이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내 돈을 더 폼나게 쓰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였으므로, 그 선행의 크기가 작다 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몇 명이나 볼지 모르는 브런치이지만 여기에 이 일을 적음으로써, 그가 시작한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으니. 혹시 누가 아는가? 이 글을 읽는 어느 재벌, 어느 부자, 아니 누구라도 자기에게 있는 돈을 더 폼나게 쓰려고 고민하기 시작할지.
요즘 바람결에 밤꽃 향기가 풍겨온다. 밤꽃 향기는 약간 역하다. 그러나 비릿한 밤꽃 향기 안에서 나는 올가을 산책길에서 주울 토실한 알밤을 기대한다. 돈도 그러길 바란다. 가장 역한 냄새를 내기도 하는 돈이 필요한 곳에 고루 잘 나뉘어지기를. 그래서 자칫 가난 때문에 비루할 수 있는 누군가의 삶을 단단하고 맛있는 알밤처럼 만들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