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로는 어제가 단오였지만, 내가 속한 마을에서는 지난 6월 첫날 단오잔치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해 국상(國喪)을 치른 해, 그 후 코로나로 꼼짝 못 했던 몇 해를 빼고는 해마다 치러지는 가장 큰 마을잔치다. 어린이집이 주축이 되고 방과 후와 경로당까지 참여하여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의 명맥을 잇고자 하는데, 올해도 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에 웃음꽃이 피었던 한마당이었다.
나는 이번 단오잔치에서 글쓰기를 하는 3학년 아이들과 함께 떡꼬치 장사를 했다. 졸업여행 비용을 스스로 마련하고 싶어 하는 3학년 아이들은 전날 밤에 열심히 떡을 끼웠고, 나는 양념소스를 준비하고 당일 떡을 굽는 역할을 맡았다. 아이들은 판매팀, 은행팀, 택배팀으로 모둠을 나눠서 열심히 장사를 했다. 아이들이 나서서 하고 있으니 기특하고도 귀여웠는지 떡꼬치 맛집이 되어 준비한 물량을 완판할 수 있었다.
부모님들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잔치마당에서 부모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몇몇 물품을 판다. 부채나 제호탕처럼 단오와 직접 관련이 있는 물품도 있지만, 시원한 여름 음료를 팔기도 하고, 친환경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공들여 만든 물건들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 뜻을 아는 부모나 교사들은 품앗이하듯이 물건을 구입해 주고 완판을 응원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놀이마당과 체험마당을 경험한다. 씨름판이 준비되고, 아빠들이 끌어주는 꽃마차를 타고, 창포로 머리를 감고, 토할 것처럼 쓴 익모초도 마신다.
놀이마당, 체험마당, 판매마당 모두 한여름을 모두 건강하게 잘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탕이 되지만, 나는 단오잔치의 백미는 꽹과리와 북, 장구로 신명 나게 열어주는 아이들의 길놀이와 마을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즐기는 강강술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소리를 그저 '견딜 수 없는 소음'으로만 여기는 주민들도 없지는 않아, 행사를 미리 공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원은 종종 발생한다. 행사를 개최하는 주최 측에는 스트레스가 되는 경찰의 출동은 아이들에게는 꽤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는 걸 위안 아닌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30년 전 협동조합으로 시작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단오잔치는 이렇듯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행사다.
나는 2002년, 공동육아가 '부모협동 보육시설'이라는 이름으로 법적 인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던 때, 서울 어느 신생 조합의 새내기 조합원이었다. 큰 아이가 18개월이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조직이다 보니 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보육료는 무척 비쌌다. 교사 대 아동 비율이 낮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린이집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출자금은 600만 원, 다달이 내야 하는 보육료는 40만 원에 육박했다. 그래도 큰 고민 없이 그곳을 보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연친화적 교육, 생태교육이라는 교육과정뿐 아니라, '사회적 부모'라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공동육아의 철학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가 너무 예쁜 나머지 내 아이만 잘 키우려는 부모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당시 함께 했던 어린이집 부모들은 스스로 준비하여 개원한 조합원들이어서인지, 이런 뜻은 꽤 잘 통했다.
그들이 '사회적 부모'가 되려는 노력은 참으로 가상했다.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너무도 보편화된 'n분의 1'이라는 기준은 모든 결정의 최하수로 두었다. 그러니 작은 안건 하나를 통과시키려고 해도 길고 긴 토론이 필요했다. 마침내 그들은 그들 아이들만 누리는 안정적이고 가치로운 교육의 혜택을 조금 더 많은 이들과 넓히려는 노력을 하기에 이른다. 그 일환으로, 비록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조손가정의 아이들을 일부 함께 보육하는 안건을 꽤 깊게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열린 첫 단오잔치.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한껏 내놓았다. 그들 중에는 의사, 한의사, 변호사, 간호사 등 전문 직종에 종사했던 부모들이 있었다. 단오잔치에 그들은 무료 법률상담, 무료 건강 검진 테이블을 열었다. 원예를 잘하는 엄마는 텃밭 가꾸는 법을 알려주었고, 금손인 부모는 장명루 짜는 법을 알려주었으며, 글을 잘 쓰는 부모는 홍보물을 만들어 돌렸다. 동네에는 떡을 해서 집집마다 돌렸다. 잔치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들은 기꺼이, 기쁘게 지갑을 열었다.
같은 공동육아, 같은 단오잔치라는 말을 쓰지만, 20여년이 지난 요즘 이곳과는 교육의 결, 행사의 결이 사뭇 다르다. 법적 규제를 받고, 세금 지원을 받는 어린이집에서 부모 지갑을 열라고 자칫 잘못 제안했다가는 민원으로 끝나지 않고 터전 문을 닫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곳에서 단오잔치에 캘리그래피 부채를 만들어 판 적이 종종 있다. 내 그림값, 글씨값을 정하는 게 가장 어려워 피하고 싶기도 했지만, 예쁘다는 칭찬에 우쭐해진 나는 부채 판매 요청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기도 했다. 힘이 든 만큼 약간의 수입이 더 생기는 것도 좋았다. 보육교사 월급이라는 건 언제나 짰으니까. 그러나 올해는 과감히 거절했다. 아이들의 장사를 도와야 하는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료로 즐겼던' 단오잔치의 좋은 기억을 마음으로나마 다시 떠올리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사회적 부모이기를 원했던 그들, 그러기 위해 비록 내 아이가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교육적 가치의 확산을 위해 지갑을 열었던 그들, 그들이야말로 공동육아의 정신을 순수하게 실천했던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교육비 비용 부담은철저히 '수혜자 중심'이 되고, 'n분의 1'이 당연시된 오늘날의 공동육아가 내게는 참 낯설다. 부디, 공동육아 현장이 내 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들을 들러리 세우는 풍조나 내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과 보육을 제공하기 위해 부모가 빡세게 품을 파는 곳으로 자리매김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전에 우리 부부를 포함한 그 젊은 부모들이 했던 것처럼, 사회적 부모가 되려는 노력을 펼칠 수 있는 부모 성장의 공간이 되면 더욱더 좋겠다. 인생 2막을 함께했던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에 대한 하나의 간절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