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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Jul 16. 2024

양심에 찔리는 일은 그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가치와 충돌하는 행위를 저지를 때 후회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


네이버에서 '양심'을 치면 나오는 위키디피아의 설명이다. 아래로 스크롤을 하면 이어지는 어학사전에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는 뜻으로 나온다.


긴 문장으로 설명되어 있는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는 사람이면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윤리의식 정도로 사용된다. 다들 지키는 규칙이나 최소한의 법규와 상식을 어기는 사람을 볼 때 "사람이 양심도 없이!"라는 관용구를 쓰는 걸 볼 때 그러하다.


양심은 키나 몸무게처럼 어른이 된다고 일정한 속도와 무게로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릴 때는 양심이 있다가 크면서 없어지는 사람도 많다. 또 어릴 때나 커서나 비슷한 크기의 양심을 갖고는 있으나 그 민감도가 변형되는 경우도 잦다. 상황에 따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고,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아주 둔감하거나 양심의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 사람이 아닌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윤리와 도덕의식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양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알고 잘 느끼며, 감탄사처럼 이를 표현하곤 한다.

'아, 찔려.'


요즘 가장 양심이 찔릴 때는 쓰레기를 배출할 때다. 우리 동네는 재활용 분류 배출 기준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 박스나 종이류는 경운기를 몰고 다니며 수집하는 동네 사람이 내놓기 무섭게 가져간다. 누군가의 생업에 도움이 된다니 마음이 덜 무겁다. 그러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비닐에 한꺼번에 넣어 배출하는 다른 재활용 폐기물들은 척 보아도 다시 재생해서 쓸 확률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내놓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하다.


일반 쓰레기를 묶어 버릴 때도 마찬가지. 옛날, 아주 젊은 시절한번 가 보았던 난지도나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과 견학삼아 찾아갔던 쓰레기 하치장은 내가 본 가장 무섭고 더러운 산이었는데, 그 산은 다름 아닌 내가 이렇게도 자주 묶어 내놓는 초록색 쓰레기봉투 때문에 생겨났음다.


방과 부엌 구석구석 넣어둔 물건들을 꺼내 치우기 시작하면 양심을 찌르는 칼은 더욱더 깊이 파고든다. 욕심 많은 다람쥐처럼 쟁여 놓은 것들이 처음엔 쓰레기가 아니었다. 필요할 것 같아 사들인 것, 공짜라고 신나게 받아온 것, 예쁘다고 모은 수많은 장식품과 선물로 받으며 좋아했던 물건들. 내 백골이 진토가 된 후에도 땅 속에 파묻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버린다고 진짜 버려지는 게 아니다. 결국은 그것들이 우리 아이들, 우리 후손들에게 미세먼지를, 불임을, 코로나를 가져다주겠지. 

아, 양심이 마구 찔린다. 찔리다 못해 두렵고 아프다. 이 죄를 어찌 다 갚나 싶다.


어느 날 아침, 아이들의 하교 후 생활을 함께 하는 공동육아 방과 후 조합 톡방에 사진과 함께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어느 조합원이 운전을 하면서 이른 출근을 하는 길에 건너편에 지나가는 한 젊은 남자를 보았단다. 차려입은 모습으로는 출근길이 분명한 그 젊은 남자는 걸어가면서 쓰레기를 줍더란다. 요즘 말로 '줍깅' 중이었던 거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같은 조합에 속한 다른 아이의 아빠였다. 그 조합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 아이들에게 말로만 환경 어쩌구 하던 내 모습이 반성도 되고, 이렇게 훌륭한 친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이라 생각도 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조합원들의 감탄과 칭찬이 그 뒤로 이어졌는데, 나 역시 '말로만 환경 어쩌구 하던 내 모습'에 반성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줍지는 못 할망정 버리지나 말아야 할 텐데. 단지 길에 버리지 않는다고, 규격봉투에 넣어 산과 바다에 버리는 것까지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니까.


여기까지는 '이 조합, 이 조합원이 했던 어떤 좋은 일'의 글감이다. 그러나 이 조합, 이 조합원들이 '하지 않았으면 좋을, 어떤 일'이 생기는 바람에 곧바로 여기에 올리지 못했다.


그것은 아이들의 생일잔치에 관한 거였다. 방과 후에서는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최대한 마음을 다해 축하를 해준다.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에 친구들이 손으로 만든 선물과 편지, 부모님의 축하 영상, 리코더 합주나 중창 같은 공연을 해준다. 생일 당일에는 자신들이 선택한 간식을 준비해 주기도 하는데, 잠시 그곳에서 교사로 일한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한 축하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자신의 생일을 축하받는 데 몰두하지 않고,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날이 되라고 부모에게 절을 꼭 하라고 말해 주지만 내 말을 실천하는 아이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우리 아이들도 자기 생일에 내게 절을 하지는 않으니, 그걸 두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생일 맞은 아이들이 방과 후 하원 후 어느 날에 외부 장소를 빌려 생일잔치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날 자신에게 무슨 선물을 해달라고 미리 요구하기도 한단다. 내가 근무했던 때도 실제로 그랬다. 심지어 회사에서 근무하던 부모가 외출하여 아이와 함께 문구점에 가서 생일선물을 사 오기도 했다. 생일잔치가 있던 날, 아이들은 손에 선물을 들고 생일 파티장을 향했다. 아이들은 신나 보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이런 모습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문화를 유지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손에 들려 있던 선물들은 포장지에 싸여 있어서 내용물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은 예상보다 빨리 아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고, 한두 해가 지나면 초록색 쓰레기봉투나 투명한 재활용 봉투에 담겨서 산과 바다로 가서 묻히리라는 것을.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좋은 문화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집단이 좋은 일을 직접 했던, 또 그 좋은 일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감탄했던 힘으로 어떤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기를 바라고 있다. 혼자, 일회적으로 하던 좋은 일을 여럿이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좋은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겠나.


나 역시 두 손 놓고 그들에게 미루며 박수만 칠 일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버리던 쓰레기봉투를 이주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육 개월에 한 번으로 점차 줄여가려 노력해야 한다. 양심을 찌르는 소비 행태는 되도록 빨리 그만두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대문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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