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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Jun 27. 2024

동지는 팥죽, 하지는 감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지기 시작할, 하지(夏至)

지난 주초부터 감자밭을 기웃거렸습니다. 춘분에 심은 감자가 그간 싹을 내고 꽃을 피웠으니 땅 속에서는 토실토실하게 커져가고 있을 텐데, '그때'가 언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 농사를 지어 '척 보면 아는' 사람도 아니고, 발자국 소리 듣고 큰다는 작물이 알아들을 만큼 부지런히 밭에 드나들지도 않은지라, 감자 캘 날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첫째 하지 절기에 캔다, 둘째 장마 오기 전에 캔다, 셋째 잎이 시들면 캔다. 이렇게 세 가지 기준을 놓고 기다립니다. 그렇게 조심스레 점치다 잡은 디데이! 그날은 하지였고, 제주도에 폭우가 쏟아진데다 다음날에 비 소식이 있으며, 감자 줄기는 누렇게 시들어 있었으니, 세 가지 요건에 알맞춤한 날이었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 선생님은 그날 저녁 아이들이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간다고, 옷이 더러워지면 안 된다고 염려했지만, 제게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랄까요.


그러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답니다. 몇 개 안 달렸으면 어떡하지, 알이 너무 작으면 어떡하지 하고요. 그러나 다행히 호미를 대는 곳마다 주먹보다 큰 감자들이 숨어 있었어요. 손맛을 본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수확을 했답니다. 앙증맞은 아기 감자까지 주워 모으니 커다란 바구니 두 개가 가득 찼습니다. 여럿이 힘을 모아 영차영차 옮깁니다. 아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풍년가가 절로 나오겠어요!


간식으로 먹을 것들을 남겨 놓고 팔기로 했습니다. 어린 농부들은 데리러 온 자기 부모에게 감자를 사라고 조릅니다. '제 살 깎아먹기(?)'인 줄 알면서도 부모님들은 기꺼이 감자를 사 줍니다. 가격을 정해 놓지 않아 얼마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시중 가격보다 더 큰돈을 냅니다. 바가지를 쓰면서도 흐뭇한 웃음이 부모들의 얼굴에 번집니다. 빛도 없이, 주는 물만 마시면서 땅 속에서 인내해 온 감자는 이렇게 아이들과 부모님에게 기쁨과 웃음을 주며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제 뜨거운 김에 푹 쪄지면 뜨거운 여름날을 버틸 힘도 주겠지요.


꽃은 더워도 계속 핍니다. 울타리 앞에 심어 놓은 해바라기도 피고, 때 이른 코스모스도 피었습니다. 쨍한 여름날이면 떠오르는 배롱나무 꽃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깃털처럼 화려하고 가벼워 보이는 자귀나무 꽃이 눈에 띄네요. 꽃보다는 열매 주머니 속의 깜장 열매가 더 쓸모 있는 모감주나무도 진노랑빛으로 꽃을 피웠습니다. 연두를 지나 초록과 청록으로 뒤덮인 산에서 분홍과 진노랑은 감춰지지 않는 빛깔입니다. 잎사귀도 독특한 모양이라 쉽게 구별되는 자귀나무와 모감주나무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나 봅니다. 이렇게 띄는 꽃 빛깔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것이 두 나무의 생존 전략인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들에게 절기를 물어봅니다. 경칩 청명, 소만 망종은 몰라도 입춘 입추 춘분 추분은 들어봤다고 합니다. 아니, 입춘 입추 모르는 아이도 동지 팥죽과 하지 감자는 지요. 마치 설날에 떡국 먹고, 생일에 미역국 먹는 것처럼 유명한 절기 음식들입니다.

콩이나 팥 좋아하는 아이 별로 없고, 삶은 감자에 군침 흘리는 아이는 없어요. 그래도 어느 때가 되면 자연스레 그 음식이 떠오르도록, 어느 때가 되면 당연히 의례를 치르도록 몸에 배게 하는 것이 문화를 전수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다음에 아이들이 커서 기억이 아스라해질 때도 이즈음 먹었던 감자 맛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니까요. 혀가 기억하는 것이 단지 음식이 아니라, 지금 경험하는 시간, 공간, 사랑, 관계가 잘 버무려진, 사랑받았던 어린 시절의 맛이기를 바라니까요. 그러니 하지에는 꼭, 햇감자를 쪄야 합니다, 포슬포슬 분이 날리도록!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하지 즈음, 전례력에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한다.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6월 24일. 예수 탄생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났다는 성서를 근거로 성탄절보다 6개월 앞선 이 무렵 세례자 요한을 기억한다. 예수님보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고 증언한다. 하지는 일 년 중에 낮이 가장 긴 날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세례자 요한처럼 하지를 기점으로 짧아지는 낮 길이만큼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렇게 비워지는 부분은 예수님으로 채워가, 마침내 성탄이 되었을 때 그분은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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