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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는 꿉꿉, 비는 오락가락

하지, 초록색 똥 누는 파랑 풍뎅이가 그리워라

by 글방구리

장마철입니다. 비가 오락가락합니다.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작은 우양산이 코로나 시대의 여분 마스크만큼이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햇볕이 '어디, 뜨거운 맛 좀 봐라!' 하며 정수리를 공격해 올 때도,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내려꽂히는 큰 소나기를 만났을 때도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게 하는 물건입니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학교 앞까지 데리러 가는 시간은 해가 높이 올라온 때입니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숨막히게 덥고 습합니다. 양산으로 볕은 가린다고 해도 더운 공기까지 막지는 못합니다. 저도 지치지만, 학교에서 나오는 아이들도 며칠 물을 마시지 못한 작물들처럼 축 늘어진 모습입니다. 또 가방은 왜들 그리 무거운지요. 이럴 땐 차라리 소나기라도 쏟아졌으면 싶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장화를 신고 웅덩이를 철벅거리던 아이들, 비가 지나가고 난 뒤 나뭇잎들이 머금었던 물들을 흔들어 주면 '비 샤워'를 한다며 좋아하던 아이들이라서요.


방과후 터전에 도착하면 텃밭용 호스로 물놀이나 실컷 하게 해도 좋겠건만 한 달 대체교사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 핑계삼아 제가 더 신나게 물놀이를 하던 때가 그립기도 합니다. 물놀이는 구청에서 수변공원에 만들어 놓는 물놀이 장에서나 할 수 있다고 하니, 물놀이를 할 때 입으려고 했던 제 여벌옷은 한 달 동안 꺼내보지 못한 채 집으로 가져가게 생겼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물놀이를 제안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무슨 놀이든 아이들과 한바탕 즐겁게 놀려면 체력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하잖아요. 물, 불, 흙처럼 자연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놀고 난 뒤의 뒤처리는 힘들지요. 씻기랴, 갈아입히랴, 뒷정리하랴. 소소한 안전사고가 염려되기도 해요. 여럿이 신나게 놀다 보면 솟구치는 힘들이 부딪힐 때도 있고, 예기치 못한 위험 요소들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교사의 체력이 감당할 수 없다거나 안전사고를 지나치게 걱정하며 몸을 사릴 때 아이들의 놀이 공간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어른을 지나 준(準)노인인 저는 이 활기 넘치는 아이들에게 그다지 좋은 교사는 못 됩니다. 몸으로 놀아줄 체력이 제게는 없거든요. 다리가 아파 고무줄을 함께 뛸 수도 없고,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손가락 관절이 아파오고요. 그러니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글쓰기를 시키는 제 역할에 만족할 수밖에요, 이렇게 너무 덥거나 습한 여름 장마철에는 더욱더.


주제는 '장마철 날씨'로 주었습니다. 아이들마다 조금씩 표현은 다르지만 비가 오락가락하고, 햇볕은 쨍쨍한데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묘사합니다. 습해서 꿉꿉하고 짜증도 나지만, 그래도 작물들에게는 유익할 거라 믿는 아이들입니다.

"...비를 많이 맞으면 찝찝하기도 하다. 비가 오락가락하기도 하다. 그래서 짜증나기도 한다. ...여름에 장마철이 오니 습해서 싫고 만약 봄에 온다면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싫고 가을에 온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어서 싫고 겨울에 온다면 바람이 많이 불어서 싫다...."(수인이는 장마철이 정말 싫은가 봅니다. 사계절 언제 와도 다 싫다고 하네요.)

"...온 몸이 끈적끈적하기도 하다.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우산을 못 가지고 오는 일도 많았다. 어떤 날은 비가 온다고 했는데 안 오고 비가 안 온다고 했는데 오는 경우도 있다. 또 맑은 날에 비가 오기도 해서 신기했다..."(예설이는 저처럼 일기예보를 잘 믿지 못하게 되겠군요. 예전에 기상캐스터로 유명했던 김동완 통보관 이웃에 살던 분들이 일기예보보다는 통보관이 우산을 챙겨 나가느냐에 관심을 두었다고 하던 일이 문득 떠오르네요.)

"...습할 때도 있고 더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산을 가져갔는데 비가 안 와서 우산을 괜히 들고 왔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서는 에어컨을 안 틉니다. 그래서 주로 집에 있습니다. ... 밭에서 식물들이 잘 자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비가 왔다가 더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집에서 사는 식물들은 잘 안 자랄까요."(승연이는 장마가 지나가고 난 뒤 밭에 자란 풀들을 본 적이 있나 봅니다. 에어컨을 안 트는 승연이네 가족, 리스펙!)

"장마철에는 비가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다. 내 생각으로 장마철은 비가 오랫동안 오락가락하는 걸 말하는 것 같다. ... 비가 많이 와서 학교에 지각할 때가 있다. 겨울에 장마가 온다면 비 대신 우박이나 눈이 많이 내릴 것 같다..."(우현이 말대로 비가 많이 오면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지요. 그래서 여름방학이 더 기다려지나 봅니다.)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온다. 그리고 후텁지근하다. 또 파도가 거칠다. 천둥과 번개가 치고, 심각하면 홍수가 나기도 한다. 대신 식물한테 물을 안 줘도 된다. 그리고 강과 바다에 물이 불어난다. 장마철이 오면 집 밖에 나가기가 싫다. 추운 것 같기도 한데 덥기도 한 것 같다...."(수현이는 하늘과 바다의 기상 현상까지 생각하고 썼네요. 집 밖에 나가기 싫은 것은 저도 동감.)

"장마철은 비가 후두둑 쏟아졌다가 금세 구름이 사라져 해가 쨍쨍해지고, 갑자기 서늘해졌다가도 습도가 올라가서 찝찝하기도 하다. 가끔 해가 있는데 비가 내릴 때도 있다. 비가 올지 말지 구름이 해를 가리다가 해가 빼꼼하고, 구름 사이로 나올 수도 있다. 어떤 날은 뜨거운 햇빛과 바람이 함께 불어 따듯하면서 덥지만 어떤 날은 비와 바람이 함께 불어서 몸이 오들오들 떨리며 추울 때도 있다. ... 비가 너무너무 많이 와서 해가 있으면 좋겠을 때는 해가 구름 뒤에서 꿈쩍도 안 하고 해가 너무너무 쨍쨍해서 시원하게 비가 오면 좋겠을 때는 구름 한점 없이 맑다..."(주연이는 장마철 특징을 참 소상하게 썼네요. 날씨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도 이렇게 잘 표현하다니.)

"비가 오면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써야 한다. 비가 많이 오면 장마다. 비가 오는 날은 학교에 도착하면 벌써 저녁이 된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올 때 학교에 가야 되어서 친구랑 같이 우산을 쓰면 자리가 좁아서 가방도 젖고 불편하다. 짐이 많으면 우산을 쓸 때 양손에 짐이 있어서 우산을 잡을 수가 없다. ... 좋은 점은 비 오는 소리가 듣기 좋다. 그리고 식물들이 쑥쑥 크게 자랄 수 있다...."(한 장 정도만 쓰라고 했는데 원고지 네 장을 꽉 채운 세빈이. 비 오는 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텃밭에 오이가 꼬부러져 달렸네요. 사물의 모양을 보고 한글을 배웠던 아이들이라 오이 모양에서 영어 알파벳을 봅니다.
배롱나무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우아하고 섬세한 족두리풀도, 원추리도 각자 다른 모습으로 뽐냅니다.
작년에도 하지 절기에 장마가 있었나 봅니다. 아이들의 글에 장마철의 꿉꿉함이 가득 담겨 있네요.
십년 전 나들이 때는 풍뎅이를 참 많이 만났죠. "초록색 풍뎅이는 초록색 똥을 눠. 그런데 파랑색 풍뎅이도 초록색 똥을 눠."라고 말했던 하은이, 어떻게 자라고 있을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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