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 절기를 지내는 동안 글쓰기 동력이 떨어졌더랬어요. 글쓰기뿐 아니라 몸을 움직여 하는 모든 일이 시큰둥해지고 도무지 하기가 싫었습니다. '삼복에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라는 속담마따나 몸도 마음도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건데,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들숨 속에 묻어 들어오는 끈끈한 공기. 공기 한 줌을 집어서 짜면 물이 주르륵 떨어질 것 같은 습기. 시커멓고 두툼하게 위협하다가 예고도 없이 터져 버리는 비구름. 거기에 내 몸에서 나는 땀내까지 도무지 청명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날씨 때문이었어요. 습(濕)이 첫 번째 원인입니다.
제가 이맘때면 늘어지는 또 하나의 이유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일곱 살 아이들과 생활했던 저는 소서와 대서, 소한과 대한에는 저만의 습관이 있더라고요. 매달 촘촘하게 세우던 계획을 여름방학(소서와 대서 무렵)인 7,8월과 졸업 시즌을 앞둔(소한과 대한 무렵) 1,2월은 마치 한 달처럼 생각하면서 지냈답니다. 그렇게 묶어 지내던 습(習)이 두 번째 원인이 되어, 절기 따라가는 발걸음을 한없이 늦추었던 겁니다.
습을 핑계삼아 제가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사이에도 모감주나무는 열매 속에 씨앗을 품고, 꽃대를 올리지 않아 조바심을 나게 했던 수현이의 옥수수에 옥수수가 열렸습니다. 폭우로 생채기를 입고 있는 나라 사정을 위로해 주려는 듯 우리나라 꽃 무궁화도 활짝 피었고요.
이맘때 아이들은 나무에 붙은 매미 허물을 찾는 재미로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얼마 전 2학년 아이들 하굣길에 매미 허물을 찾았지요. 조금 높은 가지에 붙어 있어 낑낑대며 떼고 있는데, 지나가던 다른 아이와 엄마가 뭘 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나뭇가지에서 떼어 낸 허물을 내밀었더니, 아이는 "저도 찾아주세요!"라고 하는 반면, 엄마는 "엄마야!" 하고 기겁을 하더군요. 곤충이나 곤충 허물에는 어른들이 훨씬 취약합니다, 엄마가 엄마를 급히 찾을 만큼요.
칠 년 동안 땅속에 살던 매미가 허물을 벗고 칠 일 동안 맹렬히 울다 사라지는 삶이 허망해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고작 그걸 살자고 그리 오래 버텼니, 하는 마음이었죠. 땅속의 삶은 삶도 아니라고 판단해 버린 오만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던 2학년 하율이가 이런 말을 했대요.
"매미 소리는 참 시원해."
매미 소리를 시끄럽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미가 미워질 테지만, 매미 소리를 시원하다고 들으면 한여름에만 들을 수 있는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매미는 자신의 습을 허물과 함께 다 벗어 버린 모양입니다. 비비는 몸에 습이 없어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쨍하고 청명합니다.
아이들의 텃밭에는 수박이 자라고 있나 봅니다. 아직 꽃이 달려 있다는, 참외처럼 열렸다는 수박도, 원래 텃밭인데 풀이 많아 풀밭이 되었다는 텃밭 근황도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야 알게 되다니요. 마냥 게으름을 부렸던 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집니다.
작년에도 소서와 대서를 한 절기처럼 살았네요. 매미로 날씨를 점치기도 하면서.
예전에는 7월 초순이면 장마는 얼추 끝나고 점차 삼복더위, 찜통더위로 들어가곤 했습니다만, 초복이 지나고 소서 절기 마지막날인 오늘도 여전히 비 소식을 듣습니다. 논에 물 댈 걱정을 줄여주는 고마운 단비가 아니라, 게릴라성 폭우를 쏟아붓고 가는 미운 비입니다. 성질이 나빠진 비 탓에 농작물이 잠기고 도로가 유실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죠, 이렇게 비를 고약하게 만들어 놓은 게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요. 그러니 습하다, 습해! 하고 날씨에 불평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요.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6월 예수성심성월이 지나고 나면 7월은 평범하다. 연중 주간으로 이어지는 전례는 주일에도 두 개의 초만 제대 위에 밝혀지고, 잠자리 날개 같은 사제의 제의는 나뭇잎과 같은 초록빛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5년부터 7월 셋째 주일을 농민주일로 정하고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일 년에 하루, 그것도 크게 영향력이 없는 선언에 그치는 주일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