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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Aug 18. 2024

견우와 직녀의 후예 아니랄까봐

입추의 드레스코드는 아직 초록빛

올해는 가장 길게 더웠던 여름이 될 거라고 예상된답니다. 수은주가 가장 높게 올라간 여름이 아니지만, 이 더위가 언제 끝나나 싶게 지루한 더위가 지속되는 여름이 될 거라는 말이지요.


입추는 머리 꼭대기에서 햇볕이 지글지글 끓는 것 같은 팔월 초, 모두가 휴가를 떠났는지 집에서 나오지 않는 건지 모르게 도로도 제법 한산한 팔월 첫 주간에 들었습니다. 가을이라는 낱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날씨에 입추(立秋)라니, 절기가 도무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체감하는 것과는 별개로 돌아가는 우주의 섭리 안에서 그 어딘가에서는 가을의 기운이 일어서고 있겠지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지만, 이제는 달아올랐던 땅도, 뎁혀졌던 바다도 차차 식어가기 시작한다고 믿어 봅니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난다는 칠석날은 주로 입추 절기에 니다. 저는 칠석날이 우리의 고유한 세시풍속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음력 7월 7일을 칠석날로 지내는데, 일본에서는 양력 7월 7일을 칠석날로 지낸다고 하네요. 행운의 럭키 세븐!을 좋아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다르지 않나 봅니다.


옛이야기를 잘 모르는 아이들도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잘 압니다. 원전이 보전되었다기보다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라서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별, 견우성과 직녀성을 바라보며 만들어진 설화는 맞는 것 같습니다. 여름철 밤하늘의 별자리가 어느 시기가 되면 저절로 가까워지는 자연 현상을 보면서 이토록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로맨틱한 조상들의 상상력에 엄지가 절로 올라갑니다.


옥황상제는 하늘나라 백성들을 위해 소 치는 견우와 베 짜는 직녀를 혼인하게 합니다. 하늘의 뜻으로 만난 그들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잊고 맙니다. 옥황상제는 그들의 태만으로 헐벗고 굶주리게 된 백성들을 두고 볼 수 없어 그들을 멀리 떼어놓습니다. 일 년 중 단 하루의 만남을 허락받은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시 열심히 일을 하지요. 만나는 날이 되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은하수라는 강이 흘러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자 까치와 까마귀들이 노둣돌을 놓아 주고, 오작교에서 만난 견우와 직녀는 다시 만난 반가움에 헤어질 아쉬움에 눈물을 쏟아냅니다.

별의 움직임, 그리고 이맘때면 오는 큰 소나기, 털갈이를 하는 까치와 까마귀. 

해마다 이런 자연 현상을 바라보면서 상상한 칠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남녀의 러브스토리에는 흥미가 살짝 줄어든 저는 여기에서 다른 메시지를 읽습니다. 하늘이 내린 재주(소 치는 일, 베 짜는 일)도, 하늘이 맺어준 사랑도 백성을 위하는 공동선(共同善)을 잊고 사적으로 유용될 때, 그 벌을 면치 못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들이 사랑을 하더라도 하늘나라 백성을 살리라는 본분을 잊지 않았더라면, 옥황상제는 소 치고 베 짜는 재주 외에도 더 많은 복을 그들에게 주었을 거라는 생각, 하늘나라 백성들도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했으리라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이어가 봅니다.


여름 방학을 지내고 있는 아이들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휴가를 즐기는 가정이 많아 출석률은 반토막입니다. 친구들이 오지 않으니 글쓰기도 시큰둥하게 여겨지나 봅니다. 빨리 쓰고 놀이터에 나가 놀자고 조릅니다. 폭염경보라서 지금은 갈 수 없다고, 답답하면 잠깐 텃밭에나 나가보자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지금 완전 풀밭이에요! 옥수수도 다 땄어요."

하긴, 손바닥보다도 작은 제 마당에도 시든 가지와 고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풀이 무성하게 자랐는데, 농부들의 발길이 끊어진 텃밭에서는 잡초가 이때다 하고 기승을 부렸겠지요. 그래도 배추와 무를 심어 거두려면 곧 가을 농사를 시작해야 하니, 아무래도 텃밭 정리에는 어른들이 나서야 할 듯합니다.


올해에 입추 절기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지만 내심 절기살이 글쓰기에는 무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더랬지요. 창고에 쌓아 놓은 자료들이 있을 거라 믿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작년에도 입추 절기에 그림을 그려준 친구는 딱 한 명밖에 없고, 저 역시 제대로 기록을 해놓지 않았네요. 더위와 게으름에 흐물흐물 늘어진 절기여서일까요? 운명적으로 만난 사랑에 빠져 할 일을 하지 않은 견우와 직녀의 후예임을 이렇게 증명하고 마네요.


이토록 성의 없는 절기 달력이라니! 지호 그림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 지호야, 새삼 고마워.
십 년 전 달력에도 제 그림은 없고 빈 곳이 많아 보이네요.

저는 한껏 게으름을 부려도, 성실한 나무들은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 초록빛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머잖아 해님에게서 다른 빛을 받는다고 해도 입추 절기의 드레스코드는 아직 초록입니다. 종종 갈색으로 변신하는 사마귀도 지금은 덩달아 초록이고요. 다채로운 초록 옷을 하나씩 둘씩 노랑으로, 빨강으로 바꿔 입을 때 그때는 누가 뭐래도 가을이겠지요?파란 하늘 끝 저 멀리서 출발했다고 하니 곧 도착하겠지요, 2024년의 가을날이!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어릴 적에는 8월 15일이 지나면 바닷물에 들어가지 못했다. 잠깐 들어가도 입술이 새파래져서 나왔다. 저 먼 하늘에서 가을이 시작되는 입추 절기 중에 광복절인 8월 15일이 있다. 이 날은 성모님이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성모님의 특별한 간구로 이 축일에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았다고 믿고 기린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일이지만, 믿는 이들에게 우연이란 없다. 교회에서 성모 신심이라고 하는 이 섭리를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본다면 사실 그리 못 믿을 일도 아니다. 억울하게 빼앗기고 수탈당한 자녀에게 제 몫을 되찾아주고픈 게 엄마의 마음 아닌가. 바닷물의 온도도 바뀌기 시작하고,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힘도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견우와 직녀가 벌 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부터 정신 차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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