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여름과는 차원이 다른 햇볕이
처서.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는 절기가 되었습니다. 새소리보다는 풀벌레 소리가 더 많이 들리고 높고 파란 하늘에서 구름들은 날마다 제멋대로 다른 그림을 그립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하지만 가을이라고 하기엔 한낮의 볕이 아직 따갑습니다.
여름을 지내는 동안 하지 않았던 뒷산 산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폭염에는 밖에 돌아다니는 것 아니라고, 나이 들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고 핑계를 댔습니다만, 그늘진 산길에서 폭염보다 더 두려웠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모기! 짧은 산책길에 모자와 긴 옷으로 대비한다고 해도, 땀내를 맡고 앵앵대며 달겨드는 모기떼에게 뜯기는 건 순식간이거든요.
다음주면 어느새 한가위네요. 벌초와 성묘, 친지와 지낼 명절 계획은 세우셨나요? 저는 입시 앞둔 딸내미도 있어서 올해 한가위 명절은 조용히 집에서 보낼 예정이에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는 '명절증후군'이라는 것도 앓았습니다. 며칠 안 되는 금쪽 같은 연휴여도,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부엌일을 하다 보면 남는 건 피로뿐이었거든요. 양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나니 이젠 명절이라고 해도 찾아갈 곳도, 찾아올 사람도 없네요.
끼니마다 밥상을 차려내는 일도 명절에 치를 힘든 일이었으나, 제게 더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은 친정에 머무는 동안 받을 모기의 습격이었습니다. 친정집은 산자락에 있었어요. 반신불수로 간병인과 함께 지내시던 아버지가 집을 깨끗하게 잘 관리했을 리 만무하죠. 친정에서 자고 오는 이삼일 동안 저희 가족은 눈이 쓰물거리도록 피워놓은 모기향으로도, 날렵하게 휘두르는 전자 모기채로도 감당되지 않는 수십, 수백 마리의 모기들과 혈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모기가 어디 있다고 그래? 모기 한 마리도 없어."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에게 멍게 껍질처럼 부풀어 오른 아이들의 팔다리를 보여 드려도 아버지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당뇨병과 백내장으로 눈도 성하지 않았고,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겨울용 조끼와 긴 옷을 입고 계셨으니 모기에 물릴 일이 없었을 거예요.
아무튼 그때 깨달았습니다. 처서 절기에(주로 한가위는 처서나 백로 절기에 들지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은 요즘 세상에서는 맞지 않는 속담이라는 것을요.
가을이 되면 꽃은 피지 않고 열매로 가득해야 할 것 같지만, 둘레에는 아직 꽃들이 많습니다. 봄에 씨앗을 뿌려도 늦여름이나 되어야 얼굴을 보여주는 나팔꽃부터 한여름 시그니처 같은 배롱나무꽃, 아직 시들지 않은 수국이나 도라지꽃도 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금세 얼굴을 숨겨 오후에는 찾아보기 힘든 달개비도 있고요, 국화나 코스모스는 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합니다. '늦게 피는 꽃'이 아니라, 그 꽃들에게는 지금이 제철입니다.
한가위 명절 밥상에 올라오기에는 아직 더 여물 시간이 필요한 벼와 과일들, 밤송이들에게도 날마다 허락된 하루치 햇볕과 바람이 소중한 때입니다. 어릴 때는 공감하지 못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Herbsttag)]이 구구절절 마음속에 보석처럼 박힙니다.
옛날에도 처서 때가 되면 옷이나 책을 널어 말리는 '포쇄'를 했다고 합니다. 풍습과 속담이 점차 잘 안 맞아간다고 해도, 꿉꿉하고 눅눅함을 널어 말리기 좋은 절기임은 분명합니다. 저도 아침 산책을 나가면서 창고의 창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지나가는 바람에 눅눅했던 습기를 날리려고요. 아무리 한여름 햇볕이 뜨거웠다고 해도, 창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창고에는 습기가 쌓이더군요.
여름볕과 가을볕은 이렇게 쓰임새와 차원이 사뭇 다른 듯합니다. 한여름의 햇볕은 땀을 흘리게 하는 볕이었다면, 처서의 햇볕은 속을 알차게 채워주는 볕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기왕에 널어 말리는 김에, 물건뿐 아니라 제 마음속의 칙칙한 기억도 꺼내 놓고, 찡그린 얼굴도 펴서 뽀송뽀송 말리는 절기로 보내면 참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9월의 첫날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면서 제정되었다. 피조물 보호를 위해 기도를 하기에 앞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우리의 잘못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아울러 9월은 우리나라에서 순교자가 가장 많이 나온 때라 '순교자 성월'로 지낸다. 하느님을 믿는다며 피를 흘린 신앙이 선조들의 붉은 순교라면, 이 땅의 초록산, 파란 바다, 황금빛 땅, 빛나는 꽃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신앙이 우리가 해야 할 녹색 순교, 백색 순교다. 피를 흘릴 정도로 강력한 실천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입으로 백날 신앙을 고백해 봤자 다 헛되고 헛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