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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Sep 15. 2024

달하 노피곰 도다샤

백로(白露), 달님이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시네

내일모레면 한가위입니다. 올해도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을 볼 수 있으려나요.


저는 보름달을 보면 잊지 못할 그날 밤이 떠오릅니다. 벌써 십오 년 전이네요. 바늘 꽂을 곳도 없을 만큼 촘촘하게 아파트를 꽂아 놓은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이곳 지방으로 내려왔지요. 우리 식구이사를 한 지역은 원도심과는 떨어진 곳으로 개발이 마무리되어 가던 곳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있던 동의 13층을 얻었는데, 베란다에 나가서 보면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드넓은 논밭밖에 없었습니다. 바다나 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뷰~는 아니었지만 인접한 다른 아파트가  없으니, 굳이 커튼을 달 필요를 못 느꼈어요.


이사를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단잠을 자다 중간에 깬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커튼이 없는 베란다를 넘어 들어와 방 안 깊숙한 곳까지 비추던 보름달 빛이 어찌나 고 눈이 부시던지요. 밤에는 달빛만으로 충분하구나, 가로등이 없어도 어두운 밤길을 걸을 수 있겠구나, 불을 켜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달빛이 이렇게 하다는 걸 이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구나. 달빛이 아름다워서 가슴이 벅차고 설렜던 밤이었답니다.


제가 일했던 어린이집에는 나름 자부심을 갖는 교육과정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는 제가 직접 개발한 과정은 아니지만, 이맘때가 되면 해마다 진행하는 '달 관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초승달이 뜨는 날부터 한 달여 동안 날마다 달을 관찰하러 나가는 거지요. 어린아이들만 내보낼 수 없으니, 부모와 함께 밤 산책을 하면서 달을 만나도록 교육과정을 짰습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는 신비로운 영상 등을 보여주며 달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직접 만든 공책에 날마다 관찰한 달 모양을 그려봅니다. 부모님들의 참여가 있어야 하기에, 한 달 전부터 부모 모임에서 자세히 안내하고 협조를 요청해 두지요.


하루하루가 쌓여 가면서, 초저녁에 잠깐 보인 초승달을 놓치고 아쉬워하는 마음, 휘영청 뜬 보름달을 보며 기뻐 환호하는 마음, 달 뜨는 시간이 점점 늦어져 공책이 빈칸으로 남을 때 속상해하는 마음, 비가 오거나 구름이 많아 달을 만나지 못했을 때 기다리는 마음, 환하게 밝은 낮에 구름처럼 하얀빛으로 만나 반가운 마음 들이 나날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을 그린 그림과 함께 직접 만든 공책에 빼곡히 담깁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면, 달은 그전의 달과는 다른 달이 됩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면서도 달을 보면 "달님이다!" 하고 반기지요. 곧 어떤 모양으로 바뀔 거라는 것도 짐작하고요. 그렇게 달과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겁니다.

10년 전 한가위 때 제 달공책에 남은 달님이네요. 달하 노피곰 도다샤,라는 옛 시구가 절로 읊어집니다.

올해는 더위가 오래가고 있어 백로 절기인데도 밤에는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슬슬 갈 때가 되었는데 짐을 쌀 생각도 하지 않는 무도한 더위를 탓하며 저도 제 할 바를 다 하지 못한 날들이었습니다. 약속한 글쓰기를 미룬 것은 다반사요, 시간을 보내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데도 처서 절기를 지낸 아이들의 글과 그림도 챙기지 못했답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히 자랐습니다. 깨어 있는 맑은 정신으로 살지 못하고 게으름과 잡념으로 엉망진창이 된 제 모습 같아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는 두고 보지 못하겠어서 한가위가 오기 전에 정리를 합니다. 명절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지내는 때이기도 하지만, 흐트러진 몸가짐 마음가짐을 깨끗하고 바르게 정리하는 때이기도 하니까요.

부모님 산소 벌초를 하는 마음으로 마당 정리를 했습니다. 잡초를 다 깎아내고 나니 저도 미용실에 가고 싶어지네요.
나무마다 각기 다른 모양과 빛깔로 저만의 열매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도움으로 깨끗이 정리된 아이들의 텃밭에는 겨울 양식을 장만하기 위한 배추와 무를 심었습니다.

달님이 자신의 진주 목걸이를 풀잎에 걸어주는 것이 백로의 이슬방울이라고 합니다. 한가위를 지내며 사람들의 소원을 귀여겨들은 달님이 차분하고 은은하게 가을을 가져다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더 선선해지면 다시 부지런히 아침 산책을 다녀야겠어요. 기운이 떨어져 가는 해님이 시샘하여 풀잎에서 어내리기 전에 달님이 걸어준 맑은 진주알들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서요.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설과 한가위 때는 조상들을 기억하며 합동위령미사를 드린다. 어느 성당은 제대 앞에 차례상을 차려놓기도 하고, 위패처럼 돌아가신 분들의 세례명을 적어두는 곳도 있다. 부모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휘광이의 칼날에 목이 날아갔던 게 한국 천주교 초기에 일어났던 일인 걸 생각하면, 불과 이삼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던 건지 놀랍기만 하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로 죽어야 했던 신앙 선조들이 왠지 안쓰럽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를 열심히 다니셨던 우리 시어머니는 천주교로 바꾸신 후에도 시아버지에게 절을 하지 않으셨다. 당신 믿음에 반한 행동이어서 그러셨을 터. 그러나 돌아가신 분에게 절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하며 제사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는 것처럼 진리보다 교리나 전통에 가까운 외적 행위들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느님 앞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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