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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Jun 13. 2024

해바라기가 활짝 피는 날

시원한 매실주스 한 잔 어때요?

안 보는 사이에 키를 쭉 끌어올린 해바라기처럼 이번 주간은 수은주가 날마다 더 위로 까치발을 디디며 기록을 갱신하고 있습니다. 절기상 낮이 가장 긴 하지를 향해 치닫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때다, 하면서도 몸이 겪어야 하는 한더위가 버거워 옵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십 년 전 아이들의 망종은 어땠을까 예전의 절기달력을 들여다보는데 아주 반가운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일곱 살 경은이의 '달팽이'입니다.


아이들과 다니는 나들이 길에서는 나비, 개미, 지렁이, 사마귀, 공벌레, 하늘소 등 다양한 곤충들을 만납니다. 아이들이라고 모두가 곤충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서, 개중에는 특정 곤충에 공포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아이는 나비가 멀리에서 날아와도 무서워하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으니까요. 지렁이도 호불호가 갈리는 대상 중 하나인데, 주로 어른들이 싫어합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개구리를 아직 잡지 못합니다. 뛰는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고, 왠지 촉감이 축축할 것 같아서요.


자주 볼 수 있지만 교사나 아이들에게 거부감이 별로 없는 곤충(정확히 말하면 연체동물이지만)은 달팽이입니다. 벌처럼 침으로 공격당할 위험도 없고, 나비처럼 가까이 다가서면 포르르 날아가 버리지도 않아서일까요. 걸음이 늦으니 빠르지 않은 아이 손에도 순하게 잡혀 주고, 겁을 먹으면 몸을 숨길 뿐 물지도 않고요.


그러니 아이들의 벗이 되기 참 좋은 대상입니다. 아이들은 개미 떼들을 발로 밟아 버리기도 하지만, 눈으로 오래 들여다보고 손으로 잡으며 관계를 맺는 대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대체적으로요. 그래서 지렁이나 달팽이, 개구리를 직접 만지는 우리의 손이 그네들에게는 화상을 입을 정도의 뜨거움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이들의 손놀림은 무척 조심스러워지지요. 햇볕에 나온 지렁이를 불쌍히 여겨 그늘로 옮겨줄 때는 나뭇가지를 이용하며, 달팽이를 자세히 보고 싶으면 풀잎 위로 올라오라고 살며시 대줍니다. 집 속에 몸을 쏙 숨겼던 달팽이는 풀잎 위에 안착했다 싶으면 곧 머리를 내밀고 움직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경은이,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지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달팽이가 기지개를 켰어.

목이 쭉쭉 늘어나.

달팽이 목은 끝이 없나 봐."


아이들의 말은 시(詩)입니다.

전 이 말이 너무 고와서 잊지 않으려고 기록해 두었다가, 그해 어느 어린이 출판사가 주최한 동요 공모전에 보내 보았당선이 되었어요. 동요 작곡가는 이 시에 곡을 붙여 주어서, 후에 경은이는 새로 탄생된 동요를 발표하는 무대에 올라 자신의 말로 만들어진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 노래는 공모전에 당선된 다른 노래들과 함께 음반으로도 나왔지요. 참 아스라한 기억이지만 경은이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 거예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얼굴은 발갛게 익었습니다. 터전에는 후텁지근한 더위와 습기를 날려 줄 에어컨이 작동되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병에는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 소리가 달그락거립니다.


시원한 매실주스를 간식으로 내놓으니 아이들은 두 번 세 번 리필해 갑니다. 집에서도, 터전에서도 해마다 매실청을 넉넉히 담가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설탕 속에서 잘 발효된 매실청은 여름 내내 더위를 식혀 주는 고마운 음료가 되어 주겠지만, 김장 김치에도 들어가야 하니까 살짝 아껴두기도 해야 합니다. 일 년 내내 먹는 된장, 고추장 다음으로 중요한 먹거리인 매실청은 꼭 이즈음에만 담글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의 밭에도 생명력이 넘치는지, 아이들의 눈에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나 봅니다. 그림 소재가 다양해졌네요.
5학년 아이들이 작년 망종 절기에 그린 그림에도 매실과 살구, 음료수 이야기가 등장하네요.

올해는 6, 7월에 저도 아이들만큼이나 땀을 흘릴 예정입니다. 한 달 반 가량 방과 후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로 하고 날마다 출근하고 있거든요. 아이들과 만나 놀고, 간식을 준비해 주고,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면서 지낸 지 벌써 두 주간이 지났어요.

해바라기처럼, 수은주처럼 쭉쭉 올라가는 그들의 생명력에 찬탄하지만,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린 뒤 돌아오는 퇴근길, 밤꽃을 하얗게 피워 놓고 기다리는 집 뒤편 산이 보여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영락없는 직장인 모드입니다. 일보다 쉼, 땀보다 잠이 더 좋은 사람들끼리 매실주스 한 잔 어떠세요? 해바라기 활짝 핀 꽃그늘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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