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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Jun 08. 2024

곡식 가을을 기다리며

망종(芒種), 풀들의 열매가 익어가는 작은 가을

집에서 나와 몇 백 미터를 걷다 보면 제법 큰 논을 만납니다. 제가 사는 곳이 시골이 아닌데도 둘레에 이런 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지난달 모내기를 한 이후로는 왜가리나 쇠백로, 오리들이 날아와 머물다 가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밤마실이라도 나가는 날이면 짝을 찾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요.


옆으로는 포도 농장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유치원 아이들의 단골 체험학습장인 딸기 농장도 있습니다. 그 사잇길에는 쌈채소부터 콩, 고추, 토마토, 오이, 가지 등 소꿉놀이 하듯이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주말농장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습니다. 요즘 주말농장 옆 도로에는 새빨간 꽃양귀비가 바람에 한들거립니다.


농작물은 공휴일이 없이 자라지만, 주말농장에 아이들이 북적이는 것은 날씨가 선선한 봄가을 주말입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더위나 장마가 시작되면 농사일에 진심인 어르신들만 다녀갈 뿐, 농장을 찾는 발걸음은 뜸해집니다. 그러다 김장철이 지나고 나면 대개 문을 닫고 휴경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겨울을 나고 봄을 지나 망종 절기에 수확하는 밀과 보리를 우리 동네에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요.

농부가 씨를 뿌려

흙으로 덮은 후에

발로 밟고 손뼉 치며

사방을 둘러보네."


이 노래를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부르며 놀던 때부터 밀은 제게 익숙하고도 낯선 존재였습니다. 노래도 좀 이해가 안 되었어요. 1,2절이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요. 농부가 씨를 뿌려야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거잖아요.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만 그 전에 있었던 농부의 노고는 잘 모른다는 뜻일까요?


어쨌든 저는 어릴 땐 그 노래, 그리고 성경에서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밀알의 비유가, 조금 더 커서는 제가 잠시 머문 모 수녀원의 첫 창설자를 '네 알의 밀씨'라고 일컬었던 것과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언급된 밀밭이 밀에 대해 가진 제 지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기고 나서 드디어 밀을 심고 자라는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어요. 세시 절기와 텃밭 농사를 중요하게 여긴 어린이집 교육 과정의 일환이었지만, 아이들보다도 제게 더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잘 자라는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는지까지 배울 수는 없었더라도, 양기 충천한 한더위에 밀을 수확하여 구워 먹는 '밀띠기'를 경험해 볼 수도 있었어요. 밀과 보리를, 매실과 살구를, 쑥과 익모초를, 작약과 모란을,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자연맹(自然盲), 농맹(農盲)인 제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도 행운이 아닐 수 없네요.


밀띠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바로 옆 경로당의 할아버지들이 도와주시기는 했어도 한더위에 불을 지피고 적당히 구워낸 뒤, 밀이삭에서 잘 익은 알곡만 골라내서 아이들 입에 넣어주려면 땀이 비 오듯 했지요. 손과 얼굴은 검댕이가 묻어 시커메졌지만 아이들은 어찌나 잘 받아먹던지요. 그렇게 한바탕 구워 먹고 물러나면 그 자리에서는 참새와 비둘기들의 잔치가 열렸답니다.

망종(芒種, 까끄라기 망)이란 벼, 보리 등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 종자를 거두고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다. 망종은 풀들의 열매가 익어가는 '작은 가을'이라 부를 수 있다. 까끄라기 볏과 식물뿐만 아니라 봄에 일찍 꽃이 핀 냉이나 버찌를 비롯한 오디, 살구, 앵두, 자두 같은 나무 열매도 함께 익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
-보리 그을음
전남 지방에서는 망종날 '보리 그을음'이라 하여 아직 남아 있는 풋보리를 베어다 그을음을 해 먹으면 이듬해 보리농사가 잘 돼 곡물이 잘 여물며 그해 보리밥도 달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날 보리를 밤이슬에 맞혔다가 다음 날 먹기도 했다. [때를 알다 해를 살다] 유종만/ 작은것이 아름답다/ 174-175

보릿고개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주는 겨울 작물을 수확하는 시기, 달고 시고 떫은맛이어도 자꾸만 손이 가는 보리수나, 안 먹었다고 시치미를 뗄 수 없게 입가와 혀를 물들여놓는 오디가 익어가는 시기가 바로 요맘때, 망종입니다. 나무와 풀에 달린 열매로 '풀꽃 가을'을 지내며,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을 추수할 '곡식 가을'을 바쁘게, 그리고 기쁘게 준비하는 시기인 거죠. '망종엔 발등에 오줌 싼다'는 속담도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 정신없이 바쁘지만, 나름 소소한 보람도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면 '나는 올해도 절기대로 잘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려고요.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음력 5월 5일, 가장 양기가 충천한 단옷날만큼 뜨거운 '성심(聖心)'을 연상시키는 날도 없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달이다. 예수성심대축일은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낸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그 열정을 잃지 않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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