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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Jul 20. 2024

휴가를 줬다 빼앗다니요

연중 제16주일 / 마르코복음 6,30-34

몇 주 전이었어요. 6학년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는데 아이들이 유독 지쳐 보였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생기발랄하던 모습은 없고,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지요. 하던 수업을 덮고, 아이들에게 '지금 하고 싶은 것'을 공책에 다 써보라고 했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있든 없든 고려치 말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욕구를 다 표현해 보라고요.

"그냥 뭐든지, 정말 뭐든지 다 써도 돼요?"

"이건 발표하는 거 아니죠?"

아이들은 의외로 눈이 반짝였습니다. 5분의 시간을 주었더니 쓰는 속도가 빠릅니다. 제가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휘갈겨 쓴 것들도 있어요. 자기 안에 눌러 놓은 부정적 감정이나 욕구들까지 다 꺼내 놓아도 된다고 하니 속이 후련한 모양입니다.

눕기. 자기. 숨쉬기. 먹기. 싸기. 릴스 보기. 학원 째기. 돈 벌기. 숙제 안 하기. 죽은 듯이 가만히 있기. 사고 싶은 것 다 사기. 박** 때리기. 욕 때려박기. 동생 한 대만 치기. 소고기(등심) 먹기. 마라탕 떡볶이. 김** 때리기. 폰 바꾸기. 자기.
게임하기. 잠자기. 계속 자기. 또 자기. 다시 자기. 보드게임하기. 로또 1등 당첨되기. 물수제비 세계 신기록 달성. 억만장자. **이보다 부자 되기. **이보다 똑똑하기. 브롤 랜덤큐 3대 3으로 빨딱 찍기. 호텔에서 한 달 살기. 230살까지 살기. 다시 자기.
친구들과 에버랜드 가기. 호주 가기. 파리 가기. 자유로드롭 타기. 학원 땡땡이. 12시까지 자기. 친구들끼리 여행 가기. 모모 분식 메뉴 싹쓸이. 뷔페 가기. 동물 보호소 가기. 마네킹 사서 메이크업 해 보기. 팩트(욕) 날리기. 동생 패기. 세계 일주. 아이패드 최신형 사기. 친구들이랑 기차 타기. 농구경기 보러 가기. 모나미 샤프 사기. 워터파크 가기. 장작 패기. 도서관에서 살아보기. 로또 당첨. 꼬치의 달인 하기. 마라탕 먹기.
게임. 레고. 학원 째기. 피시방 가보기. 자기. 수학 100점. 현질 해보기. 주식 사기. 마라탕 먹기. 순간이동. 제주도 일본. 억만장자. 학교랑 학원 다 안 가고 게임하기. 피구하기. 다이아 찍기. 워리어스 1권부터 슈퍼에디션. 가이드 만화책 다 사기. 마?레고 사기.? 나올 때마다 사기. 5층 집 가지기.
보드게임 파티. 게임하기. 잠자기. 큐브 30만 원 지르기. 세계일주. 새로운 핸드폰. 큐브 세계 신기록 2호 찍기. 백억만장자. 똑똑하기. 서울대. 브롤 잘하기. 강아지 키우기. 상상력 폭발. 시간 여행하기. 벤츠.
1. 번지점프 2. 지금 친구랑 변함없이 평생 가기 3. 엔믹스 응원봉 들고 콘서트 가기 4. 노래 잘하기 5. 피아노 잘 치기 6. 춤 잘 추기 7. 학교 째고 친구들하고 놀러 가기 8. 평일에 직관 가기 9. 용돈 보너스 받기 10. 초능력 생기기 11. 상처 준 애한테 그대로 복수하기 12. 공부 잘하기 13. 암기력 쩔기 14. 살 안 찌기 15. 키 크기 16. 울고 싶을 때 울기 17. 말 잘하기 18. 속 마음 읽기 19. 감정적으로 살지 않기 20. 아이폰 쓰기 21. 예뻐지기 22. 강아지 키우기

경쟁에 지친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이들 삶에까지 드리운 자본주의의 악령(쉽게 말해 '돈 귀신')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쓴 글을 읽다가 결심했어요. 한 달 동안 아이들에게 방학을 주어야겠다고요.


한 팀쯤 쉬었다고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일타강사가 아닌, 고작 세 팀 수업만 하는 제가  팀을 쉬 달의 수입에 타격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어요. 아이들의 얼굴을 뒤덮은 다크서클부터 지워줘야지요. 물론 일주일에 하루뿐인 제 수업을 휴강한다고 해서 아이들의 생활 전체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도 가야 하고, 여타의 학원도 계속 가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저라도 아이들에게 숨통을 틔워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파견하셨던 사도들이 맡은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몹시 지쳐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도들에게 휴가를 주시죠. '아싸! 쉰다아~!' 제자들의 기쁜 탄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함께 쉬러 배에 오르셨지만 군중들이 예수님 일행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휴가지까지 따라오다니, 진상으로 치자면 이런 진상도 없네요.


그런데 예수님은 군중의 간절함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따라갈 수는 없으니 육로로 달려 와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려는 마음을 차마 못 본 체하실 수 없으셨던 거죠. 예수님이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시면서 모처럼 가지려던 휴가는 날아가고 맙니다. 제자들 역시 두 다리 뻗고 쉬지는 못했겠지요. 좋다 말았어요.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휴가?'

'예수님 너무하시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본의 아니게 휴가를 반납하게 된 제자들은 이렇게 투덜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여기까지만 읽습니다만, 그다음은 예수님이 그렇게 모여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저녁식사까지 제공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불만스러웠을지, 그야말로 '안 봐도 비됴'입니다. 아예 안 받았으면 모를까, 줬다 빼앗기는 휴가라니요. 더욱이 밥까지 차려주라니요. 쉬려던 날에 야근까지 하는 심정이었겠네요.


예수님은 그런 사도들에게 놀랄 만한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아주 적은 것으로도 모두가 배불리 먹고 심지어 풍성하게 남기까지는 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신 거죠. 휴가를 반납할 수밖에 없어 툴툴거리던 제자들의 입은 놀라움으로 딱 벌어졌겠죠.

제자들의 휴가는 이렇게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겠습니다만....


돈귀신에 씐 저는 예수님에게 요런 청탁을 슬쩍 드리고 싶네요.

군중들이 안쓰러워 하루 휴가도 쓰지 못하고 일하신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안쓰러워 한 달 휴가를 줘 버린 내 사정도 좀 알아주시면 좋겠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마어마하게 뻥튀기해 주신 것처럼, 통장 잔고에 동그라미 몇 개 더 붙여 주시는 기적도 이뤄주시면 좋겠다, 뭐 요런 하찮은...^^  


오천명을 먹이시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다.
Die Speisung der Fünftausend
Und die Apostel kamen bei Jesus zusammen und berichteten ihm alles, was sie getan und gelehrt hatten. Und er sagte zu ihnen: Geht ihr allein an eine einsame Stelle, dort ruht ein wenig. Denn ständig kamen und gingen zum Essen. Und sie fuhren in einem Boot an eine einsame Stelle für sich allein. Und man sah sie wegfahren, und viele merkten es und liefen aus allen Städten zu Fuß dorthin zusammen und kamen ihnen zuvor. Und Jesus stieg aus und sah die große Menge; und er hatte Erbarmen mit ihnen allen, denn sie waren wie die Schafe, die keinen Hirten haben. Und er fing eine lange Predigt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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