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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Jul 13. 2024

이것은 강론인가, 주례사인가

연중 제15주일 / 마르코복음 6,7-13

지난 5월과 6월, 사랑하는 후배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도 출산도 드문 시절이라 청첩장을 받는 기쁨이 컸습니다. 혼자 살다가 둘이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결심이고 선택이기에, 팔을 끼고 나란히 선 신랑 신부의 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혼주도 아니면서요.


결혼하는 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 중의 하나로 손꼽히기는 하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시시콜콜한 것들을 맞춰가야 하는데요, 그러다 보면 부부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저만 그랬던 건 아니죠?)


그러나 양말을 어떻게 벗어 놓네, 치약을 어떻게 짜네 하는 지극히 소소한 일로 피 터지게 다투던 부부가 한순간 싸움을 그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아이가 아프다든지, 양가 부모님 중 누군가의 상을 당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둘이 함께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을 때인데요, 그런 때가 오면 둘은 한마음이 되어 팀플레이를 하게 됩니다. 팀플레이로 짜릿한 성공을 맛본 부부는 그제서야 결혼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지요.


저는 그간 주일 묵상글을 쓰면서 해방신학자 김근수 선생님이 쓰신 [예수평전]을 종종 참고하였습니다. 아마도 그 책에서 읽은 같으나 정확하지는 않아서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만, 예수님이나 사도 바오로와는 달리 열두 제자들은 대부분 기혼자였을 거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야 '장모'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오니 기혼자가 틀림없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이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는 말씀이 달리 들립니다. 제자들만 둘씩 묶어 보내셨을 수도 있으나, 어쩌면 부부를 함께 보내셨을 수도 있다는 거죠.


제자들만 둘로 짝지어 보내셨든 부부를 보내셨든, '둘씩' 보내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둘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것만큼이나 엄중한 일들이었습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고 마귀를 쫓아내죠,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죠, 회개하라고 선포하는 일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가져가지 말라는 품목을 살펴봅니다. 각자에게 지팡이 하나는 허용하시지만 빵, 여행 보따리, 돈을 가져가지 말고, 여벌옷을 껴입지 말라고 하시네요. 머무는 곳도 여기저기 골라 다니지 말고 한 군데 정해놓고 지내라고 하시죠. 빵, 옷, 집, 돈. 그러니까 의식주 전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신 건데요, 가져가는 물건이나 수단에 의지하지 말고 짝지어 준 사람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사명을 수행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신발을 신고 지팡이는 가져가라는 말씀은 둘이 함께 가되 스스로 자신의 안전은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 같기도 해요. 도울 일은 도와야 하겠으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업혀 가는 여정이 아니라, 제가끔 독립적 여정을 가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조금 뜬금없기는 합니다만, 하느님은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라는 두 종류로 만드셨을까, 왜 둘씩 부부로 살아가게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독일어 명사처럼 남성, 여성, 중성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셋을 한 팀으로 엮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니면 사람을 자웅동체로 만들어서 굳이 둘이 결혼하지 않아도 대대손손 자손을 번식하게 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느님이 굳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둘이 한몸을 이루는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이나, 예수님이 굳이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에는 같이 살기로 한 '옆지기'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뜻이 아닌가 싶네요. 전대에 돈을 누가 더 많이 챙겼느니 옷을 누가 더 껴입었니 하는 따위의 다툼에 시간과 열정을 버리지 말고, 주님께 부여받은 하나의 사명을 둘이 한마음으로 잘 이루라는 뜻이요. 


가진 것이 없어도, 여분의 것이 없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내 옆지기로 누구를 주셨는가를 잊지 않는 걸 겁니다. 옆지기는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택한 생활양식에 따라 동료일 수도, 자녀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평생 교직에 계셨던 친정 아버지는 가끔 제자들에게 결혼 주례를 부탁받으셨어요. 그러나 글솜씨가 없었던 아버지는 엄마가 대신 써준 주례사로 주례를 섰습니다. 저도 그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요, 괜히 얼굴이 붉어지더라고요. 주례사는 엄마의 손 끝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입에서 빛났지만, 두 분이 얼마나 자주 다투며 사셨는지는 제가 너무도 잘 알기에, 글과 삶의 괴리를 주례사에서 보았던 것이죠. 이 글 역시 그러합니다. 아직도 심심찮게 옆지기에게 싸움을 거는 제가 이런 강론을 쓰고 있다니, 이것 참! 그러니 우리 식구가 읽기 전에 영화의 한 대목을 패러디하며 황급히 글을 마치렵니다.

'지금까지 이런 (엉터리) 해석은 없었다. 이것은 강론인가, 주례사인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 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셨다.
Die Aussendung der zwölf Jünger
Jesus rief die Zwölf zu sich und fing an, sie je zwei und zwei auszusenden, und gab ihnen Macht über die unreinen Geister und gebot ihnen, nichts auf den Weg mitzunehmen als allein einen Stab, auf kein Brot, keine Tasche, kein Geld im Gürtel, wohl aber Schuhe, und nicht zwei Hemden anzuziehen. Und er sagte zu ihnen: Wo ihr in ein Haus gehen werdet, da bleibt, bis ihr vor dort weiterzieht. Doch wo man euch nicht aufnimmt und nicht hört, da geht hinaus und schüttelt den Staub von euren Füßen zum Zeugnis geben sie. Und sie zogen aus und predigten, man sollte Buße tun, und trieben viele böse Geister aus end salbten viele Kranke mit Öl und machten sie ges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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