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나는 접수실과 대기실을 내과의원과 공유하는 형태의 한의원에서 일했다.
내과가 너무 바쁠 땐 우리 직원들이 가끔씩 내 눈에 뜨이지 않을 수준에서 내과 일을 도왔다.
내과에는 일당백을 하는 간호조무사와 임상병리사가 있었지만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날도 있기 마련이니까 표 나지 않게 상부상조하는 분위기였다.
예를 들면
내시경 검사를 받은 환자의 의식이 아직 온전치 않을 때 부축해서 이동을 돕는다거나
심전도 검사실이 어딘지 몰라 방황하는 환자를 검사실 입구까지 안내한다거나
임상병리실과 엑스레이 검사실의 허드렛일을 거드는 등등이었다.
가끔은 혈관이 잘 안 잡히는 환자를 우리 쪽에서 채혈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내과 간호조무사는 일머리가 잘 돌아가고, 사교성도 뛰어났다.
다만 나로선 참 적응이 안 되는 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초진환자에게조차 접수 후 몇 분 지나면 반말을 하는 모습이었다.
70대 노인에게 하는 말은 요컨대 이런 식이다.
“할아버지(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어디 가? 이쪽으로 와야지!”
내과 간호조무사는 할아버지(또는 할머니)의 한쪽 팔을 자기 팔에다 걸고
반말을 해가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 많은 환자들의 교통정리를 혼자 했다.
환자들은 이런 그녀에게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카랑카랑하고 씩씩한 목소리에 기가 눌려서일까?
아니면 이 정도의 반말은 친근감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걸까?
하여간 환자들은 죄다 어디에 끌려가는 소 마냥 순응적이었다.
초진환자한테 저러니
재진환자와는 나 몰래 육두문자라도 웃으며 주고받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여간 이런 말투에 대해 내과 원장님께 불만을 토로하는 환자가 없었다는 게 놀라웠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 간호조무사는 한국인에게 보기 드문 체형이었다 싶다.
흰 피부에 화장기는 거의 없었고, 자연산 쌍꺼풀이라 눈이 컸다.
코는 오뚝하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야무진 입으로는 따발총 쏘듯이 말했다.
팔다리가 길고 허리가 잘록 들어가 있었다.
그에 비해 가슴둘레는 B컵 이상으로
움직일 때의 출렁거림이 가운 위로 느껴졌다.
평소 일할 때 보면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날렵했고,
엉덩이는 탄력 있게 위로 붙어있었다.
어떻게 저런 우월한 몸매를 타고났는지
난 그저 품종개량 안 하신 우리 조상님을 원망했다.
그런데 몇 달 후 이 간호조무사가 무단결근을 했다.
연락두절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고, 메시지를 남겨놨으나 회신이 없었다.
그날은 한의원 직원들이 급히 내과 환자의 접수와 수납도 하고,
치료실 보조도 하면서
양쪽 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여전히 연락이 없고 출근도 하지 않은 내과 간호조무사 때문에 우리 모두 열이 뻗쳤다.
평소 감정 기복이라고는 눈 씻고도 볼 수 없던 내과 원장님이 미간을 찌푸리셨다.
나는 어제와 오늘, 내일까지도 빡빡하게 일이 돌아갈 게 뻔해서 그냥 마음을 비웠다.
우리 간호사들과 간호조무사들, 사무직원들에게
내과를 돕되 한의원 일에 차질 없도록 특별히 더 집중하라고 당부했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에 보니
내과 원장님이 식사를 대충 하고선
식사한 자리에 그대로 넋을 빼고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수학올림피아드 문제를 갖고 와서 우리와 함께 두뇌를 풀가동할 시간인데,
그날은 다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조용히 있던 내과 원장님이 입을 뗐다.
간호조무사의 애인이 다녀갔다고 했다.
“애인이요?” 반사적으로 나는 대꾸했다.
초진환자인 척 접수까지 하고 진료실에 들어온 그 젊은이는
어디가 아프냐는 내과 원장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지 양 옆의 긴 주머니에서 쌍칼을 꺼내 진료실 책장에 냅다 꽂았다.
“ 왜, 왜 이러세요. 말로 합시다. 누구십니까?”는 내과 원장님의 말에
그 젊은이는 “ oo이 지금 어디에 숨겨놨어?”라며, 그 간호조무사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내과 원장님은 그 와중에 정신을 차려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지금 그 간호조무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만 이틀째 연락이 안 됩니다.
며칠 전 월급을 미리 가불 해달라고 해서 두 달 치를 가불 해줬는데
지금 내과는 엉망이고, 나는 돈도 떼었는데 당신은 누굽니까?
oo 이를 찾으면 나한테도 꼭 연락해주시오. “라고...
그 젊은이는 내과의사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책상에 꽂은 쌍칼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간호조무사와 동거하는 애인이며, 조폭이라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고 한다.
내과 간호조무사는 나이트클럽에서 인기가 많았고, 가끔 이 조폭 애인과 트러블을 겪었다는데
그저께 집에 들어가니 옷 짐이랑 다 챙겨서 떠나고 없더란다.
사방에 연락하고 찾아봤으나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하니
이건 필시 내과의사가 숨겨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칼을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이 얘길 하며 내과 원장님은 여전히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우리는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에 놀라워하며
칼 꽂힌 자국이 남은 내과 원장실 책상을 구경하러 우르르 달려갔다.
그 간호조무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조폭 애인과 결별하기 위해 목숨을 건 용기를 낸 것인지도 모르고,
또 숨어 사는 동안의 현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배신자다.
내과는 그날 오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구인광고를 냈다.
며칠 후 새 간호조무사를 뽑았는데,
내과 원장님은 다시는 직원들의 급여를 가불 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리 일당백의 간호조무사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