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쉰 살 즈음에 총동창회로부터 연말 모임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개교한 지 110 주년이 되던 해여서 동창회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총동창회와 별개로 우리 기수의 회장과 총무로부터도 몇 차례 연락이 왔다.
한 여름, 한 겨울 모임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였지만,
주최하는 이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모처럼 참석하기로 했다.
그날 내 옆자리에는 우연히도 어느 영화사 미술감독이 앉았다.
나는 그 사람이 내 동창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처음 본 얼굴이라 낯설었다.
우리 기수 총무가 나를 소개하며 ‘A사장님 둘째 딸이다’라고 하니까
그 사람은 나를 찬찬히 보더니
“어릴 때 얼굴이 남아있네.
니한테는 내가 꼭 밥 사야된대이.“라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다른 동창들은 그에 대해 좀 아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자신이 미술감독을 맡았던 영화 제목들을 말했다.
그중에는 꽤 유명한 영화도 있었다.
그 자신도 자부심이 큰지 표정이 밝고 여유가 있었다.
이어 나온 얘기는 이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한테는 내가 꼭 밥을 사야 된다.
너거 아부지가 우리 식구들을 살렸다. 진짜다.
그때 A사장님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우찌 됐을지 모른다. “
나는 눈이 뚱그레져서 “처음 듣는 얘기다. 무슨 말이고?”라며 반문했다.
그는 “하루는 내가 학교에 갔다 오니까
엄마가 동생들 하고 짐보따리를 들고 동네 어귀에 나와 앉아있더라.
우리가 갈 데가 어데 있겠노?
해는 져가고 있는데, 엄마하고 동생들하고 냄비 몇 개 들고 울고 있었대이.
나도 같이 남의 집 담벼락에 서 있었지.
그런데 그때 너거 아부지가 차를 타고 지나가시다가 우리 앞에서 멈추셨어.
그리고는 엄마한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시더라고.
엄마가 사정을 말하니까 너거 아부지가 우리를 차에 태우고 곧장 이장님 댁으로 갔어.
그리고는 동네에 빈 집이 있는지 물어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석 달 치 월세를 대신 내주셨어.
엄마랑 내 동생들을 빈 집으로 데려다주셨다 아이가.
진짜 너거 아부지 아니었으모 그날 우리 가족은 어찌 됐을지 모른다. “라 했다.
그 미술감독은 자라면서 고생을 꽤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자기 재능 따라 미대도 나오고 미술감독으로 성공도 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가 다른 동창들이 옆에 앉아 있는데도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며
우리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나에게 고스란히 밝힌 게 겸연쩍고 한편으론 고마웠다.
나와 아버지는 일찍부터 금이 쫘악 간 상태로 팽팽하게 살아왔다.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두고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 주의를 했다.
나는 그 거리가 멀어질수록 편했고, 가까워지면 불편했다.
내가 아버지를 바라본 관점은
최소한 지구 자전축만큼은 비뚤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흔 살 무렵에 비로소 나는
아버지 안에 있는 양달과 응달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굳이 덧칠을 해서 더 왜곡시키고 싶진 않았다.
미술감독의 얘기가 끝나자 더 놀라운 얘기가 다른 동창의 입에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