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우열반

얼떨결에 열등반으로

by 뚜와소나무

시골에서 자란 나는 중학교 때까지 선행학습이란 단어를 몰랐다.

여고 입학을 앞둔 2월에 소집일이 있어 학교에 갔다가 느닷없이 시험을 보게 됐다.

나를 포함해 시골에서 올라간 친구들은 이걸 왜 보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하여간 시험과목은 수학과 영어 딱 두 과목이었고, 필기구는 학교에서 나눠줬다.

고등학교 입시 이후로 석 달을 편안히 동면한 나는

몸무게만 8kg이 늘었고, 머릿속은 매미 껍질처럼 텅 비어있었다.

수학 문제는 절반 이상이 모르는 내용이었고, 영어도 처음 본 단어들이 많아 대충 찍었다.

입학식 다음날 칠판 오른쪽에 시간표가 붙어 있었는데, 수학 AB반과 영어 AB반 표시가 있었다.

이게 뭔가 했더니 A는 우수반이고 B는 열등반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수학과 영어 따로

학생들 이름을 주욱 부르시고는

‘호명한 학생들은 일어나 앞으로 한 한기 동안 옆 반에 가서 수업을 받으라.’고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날이 겨우 개학 둘째 날이었다.


진주여고에 입학할 정도면 다들 자기가 나온 시골중학교에서 전교 10등 내로 들었던 학생들이다.

그런데 전교권은커녕 자기 반에서 30등 이하라는 낙인을 찍어 옆반으로 가라니!

수치심과 함께 옆반과 우리 반 학생들의 대이동이 우당탕탕 시작됐다.

잘 정리 정돈된 내 책상을 놔두고,

누구 자리인지도 모르는 데 가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진주시내에 살던 학생들은 소집일 시험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었고,

고1 한 학기 분량의 수학과 영어에 대해 선행학습을

내가 탱자탱자 놀던 그 석 달 동안 부지런히 준비해왔다고 했다.

아직 열등반 충격이 가시기 전인데

나는 선행 학습자들과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현실을 맞닥뜨렸다.

좌절감이 내 발목을 비틀었다.

무지와 게으름을 자책하면서도 뭔가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같은 출발선에서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하는 줄 알았건만

나같이 어리숙한 시골뜨기들만 출발선에 서 있고,

진주 시내 출신들은 50m 앞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여고 1학년 1학기가 시작된 이튿날부터 내 머리는

성적에 대한 압박 헬멧을 뒤집어쓴 듯 꽉 죄어졌다.

공부의 즐거움을 느끼는 건 사치였고,

쟤들을 언제 따라잡나 하는 초조한 마음이 나를 움츠리게 했다.

열등반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은 우리들 수준을 고려해 기본에 충실하셨고 진도가 느렸다.

그분 자신은 천재라 할 만큼 뛰어나셨지만

열등반 학생인 우리를 위해 쉽게만 가르치셨다.

그러나 중간고사 시험지에 나온 문제들은 열등반 학생들을 배려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험을 본 직후 나는 문제지를 따로 사서 최고 난이도 응용문제를 풀어나갔다.

열등반 수업시간에는 전혀 다뤄주시지 않으니 혼자서라도 공부해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전두환 정권 시절이라 과외와 학원 다니는 게 엄격히 금지되어 자습시간에 다들 독학하는 분위기였다.

개학 이튿날부터 열받은 나는

내 등수를 반씩 접어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진주여고에 온 학생들 대부분은 공붓벌레였다.

그래서 단기간에 내 등수가 올라가진 못했다.

첫 시험에서는 전교 688명 중 97등,

두 번째 시험에서 45등, 세 번째 등수는 24등, 그다음은 12등

마지막으로 전교 8등, 이렇게 거의 반씩 접어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7~8개월이 걸렸다.

여고 자체 시험에서는 전교 10등 이내가 어려웠지만

전국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전교 10등 안으로 무난히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처음 경험한 게 뭐냐면

전교 10등까지는 교장실에 불려 가서 격려와 치사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듣는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장차 우리 진주여고를 빛낼....'로 시작되는 격려사였다.

중3까지는 공부가 재밌었고 시험도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나의 고등학교 생활은 공부와 시험의 재미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폭망각이었다.

밥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세 끼에 간식까지 꾸역꾸역 삼키는 상황과 비슷했다.

억지로 공부했다는 소리고, 지겨웠다는 말이다.


그나마 이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은

괴도 루팡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서였다.

혼자 있을 땐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으며 자주 멍 때리고 있었다.


고1 추석에 나는 아버지께 '자퇴하고 혼자 독학한 후에 18세에 대학입시를 보고 싶다'라고 말씀드렸다.

놀란 아버지는 우리 집에 다녀가시는 친척들의 의견을 내세워 반대하셨다.

내가 처한 현실과 다르게 그분들은 여고시절을 꽤 낭만적이고 좋게 인식하셨던 것 같다.

세상 물정 모르는 17세 소녀가 어떻게 하겠는가? 추석 연휴 끝나고 조용히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고교내신제와 우열반, 이 두 가지는 참 불쾌하고 부담스러웠다.

성적에 따라 선생님들의 학생에 대한 대우가 달랐기 때문에 모멸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우리들은 공부하는 기계 같았고, 인간으로 존중되는 느낌을 받지 못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우열반이 효율은 좋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리 대단한 차이일까?

한창 예민한 시기에 나는 학교 시스템이 강요하는 폭력을 당한 것 같이 느꼈다.

그나마 나는 수월하게 열등반을 벗어났지만

내 친구들 중에는 그대로 무너져 내려 회복을 못한 경우도 있었다.

같은 하숙집에서 때때로 그들의 좌절감, 무기력, 자존심 상하고 부모님께 면목없어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맷돌이 목에 매어져 있어 고개를 들지 못하는 1학년 1학기의 내 모습을 그들에게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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