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작은 애의 대화

김치

by 뚜와소나무


7년 전 어느 날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집 둘째 아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고 하셨다.

' 네? 다정스러운 이 며느리 대신 지금 손녀를 찾으시는 겁니까?'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차마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

작은 애를 두말없이 바꿔드렸다.

작은 애와 어머니는 그렇게 10분간 통화를 하더니

나를 바꿔주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의 존재감이 확실히 사라졌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할머니와 무슨 얘길 나눴냐고 물어봤다. 그냥 김치 얘기를 했다고 한다.

고2 손녀와 77세 할머니가 김치 얘기를 10분씩이나 했다고? 참 아리송하다.

우리 시어머니께선 말 수가 거의 없다. 말하는 게 귀찮다고 여기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시고, 또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배려가 많다.

이런 성품인지라 우리 집 아이들은 할머니와 통화하면서

남자 친구 얘기, 학교생활 얘기, 엄마 아빠 흉보는 것까지 다 한다.

애들이 할머니와 통화할 땐 목소리가 고음에다 몹시 크다.

옆에서 듣고 있다간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서 종종 자리를 피한다.


이 통화가 있기 전에 김치와 얽힌 일이 있긴 했다.

설날 시어머니 댁으로 다 모였을 때 딱히 할 일이 없는 조카들이 안방 TV 앞에 앉아있었다.

우리 집 작은애가 그 방에 들어오더니 양해를 구하면서

"할머니랑 단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다 나가주세요."라며 제 사촌들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어머니 앞에 다소곳이 앉아

저거 할머니 손을 포개 잡고서

"할머니, 할머니 댁에 김치가 얼마나 있어요?"라고 물었다.


"그건 왜?"


"할머니 잡수실 김치가 적으면 그냥 말고요,

김치가 많으면 저한테 한통 주세요."라고 했다 한다.


어머니께서는

“너희 집에는 김치가 없냐?”며 전라도 특유의 느린 사투리로 되물었다.


작은애는

할머니, 저희 집에는 맛없는 김치만 많아요.”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딤채를 통째로 내주실 표정으로 안방 문을 열고 나오셨고,

덕분에 우린 한동안 어머니의 맛난 김치로 밥을 먹었다.


결혼 30년 동안

내가 어머니댁으로 김치를 담아 보내드린 건 딱 세 번 밖에 없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김치를 보내주신 건 백 번도 더 된다.

84세인 지금도 어머니께선 간간히 김치를 담아 보내주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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