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딱지와 초록 대문

친구에서 절친으로

by 뚜와소나무

고1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장장 10여 년간 나는 하숙 생활을 했다.

덕분에 내 혀는 모든 맛에 쉽게 적응하며,

매 끼니 맛있게 잘 먹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첫 하숙집은

여중 선배에게 하숙집 구하는 요령을 물어보다가

덜컥 그 선배와 한 방을 사용하기로 쉽게 결정 났다. 운이 좋았다.

선배는 성격이 원만하고 춤을 잘 췄다.

하숙집 아저씨는 버스기사님이었고, 아주머니는 평범하고 솜씨 좋은 분이었다.

우리가 순순이 몇 달간 잘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나는 하교 후 하숙집으로 들어서면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다녀왔습니다'는 나의 인사에 반응이 없었다.

조용하고 짧은 복도를 지나올 때 나는 열린 안방 문 사이로 장롱에 붙은 빨간딱지를 얼핏 보았다.

'저런 게 부적인가?' 혼자 상상하면서도 뭔가 싸했다.

아주머니는 서둘러 우리의 저녁 밥상을 갖다 주셨다.

그런데 계속 우리의 시선을 피하니까 되려 아주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고,

그제야 아주머니의 눈두덩이가 부어올라 있음이 눈에 띄었다.


하숙생 둘이 식사를 마치자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힘겹게 두어 마디 하셨다.

"학생들, 미안한데 지금 바로 다른 하숙집 알아봐.

할 수 있다면 오늘 밤이라도 이사 가고,

아니면 내일까진 꼭 이사 가야 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왜 그리 됐나 했더니 아저씨가 회사에 연대보증을 섰다는 것이다.

회사는 빚을 해결하지 못해 도산했고, 아저씨도 그 막대한 채무를 변제할 돈이 없었다.

아저씨가 그동안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으니

벌건 대낮에 날벼락을 맞았을 아주머니 입장도 이해되지만,

하필 기말고사 이틀 전인 지금 당장 하숙집을 옮기라 하니

십 대 소녀 둘도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어쩌랴!

다른 친구들이 기말고사 준비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할 그 시간에

나와 선배는 새 하숙집을 찾아 상봉서동을 헤매고 다녔다.

한참 돌아다녔지만 우리가 살던 서쪽 동네에는 빈 하숙집이 없었다.

선배와 나는 각자 흩어져 그 옆동네까지 탐색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나는 4차선 도로를 지나 대각선 방향에 있는 낯선 동네 가로등 밑을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초록색 철제 대문에 '하숙생 구함'이라고 붙어있는 하얀 종이를 발견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아마도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나는 부저를 눌러 주인아주머니를 만났다.

하숙 조건을 서로 맞춰본 후 밤 9시가 되어가는 시각에 내일 바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이 골 때리는 새 하숙집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각설하고.


하숙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이불 짐, 옷 짐, 책과 책장, 책상이 전부였지만

갑자기 이런 상황에 놓이고 보니 애초에 계획했던 시험 준비 전략은 무산되고,

책을 펴놓아도 마음이 흩어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내일 어디에서 리어카를 빌려 짐을 옮겨야 할지 걱정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시험 전날이라 오전 수업만 하고 파했다.

나는 서둘러 하숙집으로 돌아와 짐을 한 군데로 몰아놨다.

그때 문 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삼천포 출신 내 친구가 와 있었다.

동네에서 리어카를 빌려서 우리 하숙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진짜 깜짝 놀랐다.


나는 3반, 그 친구는 6반으로

최근에는 만난 적도 없는데

누구한테 들었는지 내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부탁하지도 않은, 그러나 너무나 간절했던 리어카를 끌고 나타나 주었다.

우린 둘 다 씩씩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여고생이 리어카를 빌려서 동네를 돌아다닌다는 게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 나보다 잘했다.

그 친구는 내신 1등급, 나는 2등급이었으니 어쩌면 나보다 더 치열한 입장에서 경쟁했을 것임을 알기에

나는 눈물 나게 고마웠다.


우린 둘이서 리어카를 밀고 당기며 이삿짐을 옮겼다.

내가 새 하숙집에서 짐 정리를 하는 동안, 그 친구는 리어카를 반납하고 나서 두말없이 시험공부하러 갔다.

그 친구의 기말고사 성적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 때문에 1등을 못했던 것 같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쌓인 지 어언 40년이 되어간다.

그 친구에게 고마웠던 적이 그때 한 번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가장 뚜렷이 기억나는 건 아마도 당시 상황이 좀 특별해서일 것이다.

그 특별한 고마움이 내 안에 빚진 마음으로 새겨졌다.

머리가 돌이라서 새기기가 어렵지

한번 새기면 100년은 간다는데, 그럼 앞으로 60년 더?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그 친구를 위해 해 준 게 뭐가 있었는지 생각해봤지만 도통 기억나는 게 없다.

그래도 40여 년 우정이 지속된 데는 오가며 쌓인 정이 있긴 있을 것인데 말이다.

2년 전 내가 은퇴하고 서울을 떠날 때

그 친구가 내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는 것만으로 의지가 됐는데,

네가 서울을 떠난다 하니 마음이 너무 아프고 허전하다.'


친구란 무엇일까?


빨간 하트가 붙은 이 딱지는

시골 우리 집 장미울타리 안으로 들여서 조금씩 갚아가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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