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 온 시간과 더 일할(수 있는) 시간이 비슷해져 가면서 퇴직이나 공로연수가 멀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2030년이니 2040년이니 자신의 퇴직 햇수부터 꼽아 보는 직원들도 있는데 모두의 관건은 퇴직 이후의 삶이다. 내 경우에는 언젠가부터 업무 관련 대하는 이런저런 수행업체 사장님들의 면면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분들의 표정과 움직임에서 퇴직, 정확히는 퇴직 이후의 삶을 연결시켜 보는 것이다. 실물경제에서 확실한 소득을 올리며 오늘도 영업과 사업 수행에 만전을 기하시는 그분들을 보면 분명 공공기관의 갑갑하고 텁텁한 느낌과는 다른 에너지와 활기가 느껴진다.
특히 50대 붉은 얼굴을 하고 현장에서 일하시는 남성 사장님들이 그러하다. 아무리 어린 담당자도 담당관님, 감독관님으로 칭하며 깍듯하게 대하고 되도록 발주처 측 모든 요구에 맞춰 주려 하지만 어딘가에서 자신감과 당당함이 묻어난다. (영업용이지만) 늘 싱글벙글한 얼굴에 특유의 여유와 자부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분들은 제 각각 몸담은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고 수십, 수백 건의 크고 작은 관급사업들을 수행했을 것이다. 적게는 네다섯 명, 많게는 십 수명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을 것이며 그러려면 모르긴 해도 연간 수십억 가까이 매출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어렵다 불황이다 하며 앓은 소리들도 하시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껏 해당 업계에서 버텨온 그들은 내가 해보지 못한 갖가지 현장들을 경험했다. 그저 나라에서 정해주는 돈으로 정해진 일을 수행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들을 겪었고 실제로(!) 뭔가를 만들어 설치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작업을 시작하고 마친다. 그 사이 벌어지는 갖가지 어려움들도 실태를 ‘파악’하거나, 문서로 작성해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닌, ‘실재’ 뭔가를 한다. 잘하든 잘못하든. 그리고 대가에 따른 돈을 받는다. 나와 내가 속한 조직이 하는 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니 퇴직 이후의 생계 같은 내가 아쉬운 부분만을 탐내며 부러워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이제는 떠올리기도 민망한 까마득한 예전이지만 나도 관공서를 드나들며 용역을 수행하던 때가 있었다. 원고와 시안 출력물을 잔뜩 싸들고 여기저기 발주처를 찾아뵈었(?)는데 소규모 기획 회사에서 계약서상 을이나 병으로(까지!) 일하던 때였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면 대부분의 담당자들, 특히 공공기관 담당관님들은 무한 수정을 반복했는데 지긋지긋함에 진저리 치다 못해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이 돼서야 수정안은 확정안이 되었다. 하지만 휴식도 잠시, 본격적인 현장 대응이 이어진다. 그러던 시절 내 소원은 단 하나. 갑의 입장에서 일해보는 것이었다. 나도 저 감독관측, 즉 발주처가 되어, 관공서의 입장에서 일해보는 것.
하지만 지금 이 그 시절 기억을 더듬으면 영상 편집을 새롭게 하듯 조금 다른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그 현장 단계. 작업장 여기저기서 온종일 작업하시던 분들. 간간히 불꽃 튀는 용접작업을 별말 없이 뚝딱뚝딱 마치고 돌아서는 철공팀장님이나 여기저기 벽체 곳곳에 타카칠이나 페인트칠을 하시던 분들. 함바집 옆자리에서야 비로소 마스크 벗은 모습을 뵀던 목공팀 사장님. 실제 당시에도 그분들의 모습은 꽤 그럴싸해 보였다. 말없이 (각종 장비 돌아가는 소리에 너무 시끄러워 말을 많이 할 수도 없었다.) 각각 자신의 할 일에 충실하며 한 시간 한 시간, 일분일초를 작업으로 채우는 팀들. 그에 비해 나를 포함, 우리 팀 주변에는 얼마나 말만 난무했던지. 겨우 몇 컷 시안을 두고도 꼭 한두 마디 보태며 지나가는 팀과장님들에 시달리고 또 시달리던 기억. 결론이 미뤄진 시안과 원고들이 그저 잡동사니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에 비해 현장 작업 중인 그분들은 안전과 이런저런 이유로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지 않았고 웬만한 작업은 막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해 지기 전 당일 작업 마감을, 장비 온오프 확인 당부 정도를 언급했던가. 아무튼 떠올려보면 그 역시 부러움과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때도 막연히 알았던 것 것이다. 아,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먹고살 걱정은 없겠구나….
지금도 그런 용한 기술을 갖추지 못해 그런 걸까. 오늘을 살기에도 버겁건만 퇴직 후의 시간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 살포시 지금 불안에 미래 불안이 얹어진다. 작든 크든 나만의 기술과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팔릴 곳이 있으며 내가 원하는 한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오늘 뵙는 저분들의 표정에서 또 한 번 확인할 뿐이다. 내가 대하는 모든 사장님들이 건승하시길. 나도 생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나만의 기술을 마련할 수 있길 바라며.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