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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_조지오웰

자연의 법칙이 사라진 세상


모든 것이 사실일 수 있었다. 소위 자연의 법칙이란 것은 허튼소리였다. 중력의 법칙이란 허튼소리였다. 오브라이언은 "만일 내가 원한다면 나는 이 마루 위를 비눗방울처럼 둥둥 떠다닐 수 있소"라고 말했다. 윈스턴은 그것을 풀어냈다.

'만일 그가 비눗방울처럼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동시에 만일 내가 오브라이언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본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잠겨 있던 표류물 덩어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듯이 그의 마음속에 '그것은 정말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다'라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는 그 생각을 즉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 생각의 오류는 명백했다. 그것은 우리들 밖 어딘가에 '진짜'일이 일어나는 '진짜'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본문 中




이 책은 전체주의 사상에 점령당한 1984년의 영국(작품은 가공의 국가 '오 세 아시아')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잘 알다시피 이 책은 유토피아의 반대되는 디스토피아의 실상을 그려낸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책이 1949년에 출간되었으니 집필할 당시의 저자를 상상하면 40년 이후의 경제와 기술혁신이 가져다줄 미래는 암울했었던 것 같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새로운 제조공정이 가져다준 '산업혁명'은 인류 전체의 커다란 전환기였다. 농업에만 매달리며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던 사람들은 기계공으로 전락되었고, 삶의 질은 그대로인 채 피폐한 기계부품의 일환으로 전락되었다. 감정이 없는 기계와의 전쟁은 불합리 그 자체다. 아마도 그 현실을 지켜보던 '조지 오웰'은 그 속에서 산업생산력과 교환된 인간적인 삶의 반납을 보지 않았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제일 먼저 들었다.


1984년 오세아니아는 '빅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이 24시간 국민을 감시하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1940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는데, 그의 국가 '오세아니아'는 전쟁 중이다. 오세아니아 시민들은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전체주의 정권(당)의 지시에 따른다. 그렇지 않을 경우 숨어있는 '사상경찰'과 '숨어있는 마이크'에 발각되어 어느 순간 '증발'되어 버린다. ('증발'이란 의미는 모든 기억의 기록에서 사라진다는 뜻)


아무리 국가가 시민을 철저히 감시한다 해도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지만, 평생 전쟁 중이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또한 성본능 에너지를 억누르는 '2분 증오'와 '증오 주간' 그리고 당이 기획하고 실행하는 '공개 처형'등의 행사는 인간의 분노와 잔인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시민들은 당의 지시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적인 인형과도 같다. 또한 '사상경찰'이 항상 주변에 도처 되어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있지만, 가족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당에 고발하여 부모자식을 잡아간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조차도 당의 일원을 만든다(?)는 행위이지 사랑의 행위는 아닌 것이다. 바로 옆에서 있던 사람이 사라져도 놀라거나 의심하지 않는 암울하고도 끔찍한 세상이다. 


대중은 외부의 커다란 위협들이 자신의 개별적 힘으로는 대항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연대할 힘을 스스로 포기하고 결코 항거하지 않는다.


주인공 '윈스턴'은 1940년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빅브라더'와 당의 행동에 의심을 품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빅브라더에게 대항했다는 '골드슈타인'과 '형제단'의 얘기는 마음속에서 반발심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만든다. 그러다 '줄리아'라는 여자당원과 사랑에 빠지고 되면서 당의 불신이 더욱 커지게 된다. 부부의 성생활까지 통제하는 세상에 있다가 인간다움을 느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윈스턴과 줄리아는 믿었던 형제단원(아니 사실은 사상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모질게 고문당하고 부서진다. 그 참혹한 고문과정은 완벽한 정신개조과정을 거쳐 새로운 윈스턴과 줄리아로 재탄생된다. 책의 마지막은 '나는 빅브라더를 사랑한다'로 끝난다. 무력한 인간의 종말이랄까.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전태일은 없다.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를 시청한다. 언론에서 뉴스를 뿌려주고 보도되는 틀을 흡수한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제 우리는 그 뉴스의 기자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의심하고 비판하는 사고를 함께 병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고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각과 기억과 사유를 제지하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무섭고 암울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 세상이 소설 속에 있었다.


'오세아니아'는 왜, 항상, 언제나 전쟁 중일까? 왜 소설 속에서는 '윈스턴'을 제외하고 대부분 당과 빅 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까.. 초기 독서시간엔 아무리 철저한 감시 속에 살더라도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세아니아가 초기엔 전쟁을 정말 했다. 하지만 초세세력(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들은 20세기 중엽 전쟁을 멈췄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시민을 통제하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거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시민들이 사는 도시에 폭탄과 미사일을 투하했다. 공포와 위험이 항상 도처에 도사리고 있게 만들고, 죽지 않을 만큼 배급을 해주면서 대중의 위험에서 지켜주는 군대가 있다고 보여 주었다. 적국에 대한 적개심을 띄우고 국가에 불필요하게 항거하는 시민들은 텔레스크린으로 적발하여 복종을 유도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신어'를 통해 국민의 사상 통제를 한다는 점이었다. 신어란 기존에 사용되는 여러 동의어 중에 한 가지만 남기고 모두 삭제함으로써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도록 개발하는 언어를 의미한다. 단어의 사용 폭을 조금씩 줄여가면 점차 인간은 사고의 폭도 줄어간다. 이는 미사일, 폭탄, 전쟁보다 무서운 장치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빅 브라더'와 당에게 항거하는 대중이 없을까 생각되지만 책의 말미에 다다르면 그 구조적 실체에 입이 벌어진다.(아래 참조)


빅 브라더는 세계에 내보이기 위해 선택한 당의 겉모습이다. 그의 기능은 조직보다 개인에게 더 쉽게 느껴지는 사랑, 두려움, 존경 등의 감정을 모으는 초점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빅 브라더의 밑에는 내부 당이 있다. 그 숫자는 600만으로 제한되고, 오세아니아의 인구의 2%가 채 되지 않는다. 내부 당 밑에는 외부 당이 있는 데, 내부 당을 국가의 두뇌로 묘사한다면, 외부당은 정확히 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밑에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노동자들'이라고 부르는, 아마도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우둔한 대중이 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계급 분류로 보면, 노동자들은 하류 계급이다.



그 하류 계급들에게 당은 매일같이 텔레스크린을 통해 따라 하게 만드는 말들이 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분명 비합리적인 말들 이건만 대중은 합리적인 말처럼 큰소리로 따라 한다. 대중은 대중의 안녕을 위해 당이 존재하고 권력을 추구해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한다. 일반 대중들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함에 젖어 본질을 가끔 잊는 오류를 발견하곤 한다. 미얀마의 쿠데타로 죽어가는 시민들을 보고서야 민주주의 정권의 감사함을, 자유를 실감하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무서웠던 내용은 기록부에서 과거를 수정하는 장면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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