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적 감정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내가 무엇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닌가? 그것은 자기 변화를 위해 유용한 질문이다.
-'지혜롭게 나이 든다는 것' 中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처럼 싸우는 친정부모님의 공포는 자식들이 성장해 출가시기가 되어도 종지부를 찍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심해지셨다.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가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술독에 빠지셨다.
엄마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기는커녕 마시는 술값의 출처를 캐물으시며 아까워하셨다. 어렸지만 최후의 자존심마저 파고드는 엄마의 잔소리는 아버지의 분노에 불을 지필거란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싸움이 나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구는 언니들과 동생의 방관을 나까지 보탤 수 없었던 것은 착한아이라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두 분 중 누군가는 언제고 사라져야 끝날 것 같은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부서지는 살림살이와 찢어질 듯 울고 있는 엄마의 설움을 처참히 바라보면서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은 서로 맞는 사람끼리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그런 나에게 결혼은 전쟁터에서의 탈출과도 같았다. 그들의 싸움은 중재자가 있건없건 이어질 운명이란 사실을 깨달았고 나는 나의 인생을 찾을 필요성을 느꼈다.
남편의 직장찬스로 작지만 2층집 두 칸 있는 신혼방을 전세로 얻을 수 있었을 때는 너무 행복해 미칠 것만 같았다. 둘째 언니보다 일찍 부모 곁을 떠나는 나는 엄마의 괘씸죄에 걸려 변변찮은 살림살이로 시작을 해야 했지만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깨끗한 도화지에 새롭게 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방 하나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이쁜 공간이 아닌 시골에서 남편의 동생, 시동생이 취직 전까지 사용하겠다고 차지해 버렸다. 당연히 그래도 되는 양 짐을 싸들고 올라와 버렸다.
시동생은 남편과 외모서부터 성격까지 완벽히 달랐다. 성격변화가 롤러코스터였고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윈 없었다. 한 살 아래인 형수가 만만해서 그랬는지, 내가 편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남편과 쓰는 방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누워 시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퇴근 무렵이면 가난한 살림 따윈 개념치 않고 입 맛없다는 푸념으로 회사전화로 주문이 많았다.
시동생은 나의 퇴근시간을 설정해 놓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에서 문을 잠가 벌을 세웠다. 내 집 앞에서 열어달라 한참을 문을 두드리다 보면 기가 막힌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그는 깜빡 잠들었다는 능청을 떨며 열어주기 일쑤였다. 남편이 올 때까지 백수생활에 지친 시동생의 술상대를 할 때는 도대체 이 결혼생활이 뭔가 회의스러웠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일복 많은 남편이 12시쯤 퇴근할 때까지 말 많은 시동생과 꼬박 같이 있어야 하는 점이었다. 남자가 말이 그리 많은 것을 세상에서 처음 알았달까. 나는 그 뒤로 말 많은 남자가 제일 싫다. 취직을 해서 내려가기까지 꼬박 2년을 나는 정말 질리도록 속으로만 시동생을 미워했던 것 같다.
그 핑크빛 작은방은 시동생이 내려가자마자 시어머니가 바통터치 하셨다. 그 뒤로도 시동생은 나의 인생에서 힘든 시기마다 등장했지만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용서가 될 정도였다.
얼마 전에 시동생이 술에 취해 전화가 왔다. 맨 정신에 통화하고 싶다고 말해도 꾸역꾸역 자기 말만 하는 것은 여전했다. '형수님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세요? 독산동 작은 방에서 같이 살 때가 너무 그리워요.'
뭐라고?!
전화를 억지로 끊고 나서 남편이 놀라도록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감정의 멀미가 목까지 차올라 메스꺼웠던 것이다. 그의 모든 푸념을 인내하고 참으며 경청했던 시간들이 그에게는 따뜻한 애정으로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그는 즐거웠고 나는 괴로웠다면, 내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나는 그 시절이 노동처럼 고달팠다. 원만한 시월드의 관계를 위해 나를 잃는 것으로 선택했던 잘못이다.
나의 기억과 상대의 기억이 상충되는 것은 서로의 감정이 주관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이 즐겁지 않았고 전혀 그립지도 않다.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역류되는 감정인 것이다.
친정부모님이 무섭도록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싸움을 했던 것을 말리면서 나는 무의식 속에서 싸움을 하지 않는 관계만이 현명한 삶을 살아가는 정석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감정교류는 누군가 참는다고,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감정을 지키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 나는 깨달았다.
사람의 성격은 수많은 시간의 부침 속에 변화하고 성숙해져 간다. 지금의 내 모습이 있기까지 지나온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의 내 모습도 나였으므로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고 이해하려 한다. 내 인생이므로 누구의 인정도 만족도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