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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을 나오며..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


인간은 감기나 암이나 우울증 같은 병들이 사실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앓는 동안에 일어나는 합병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암으로 죽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병에 의해서 죽을 뿐이다.  인간이 암이나 뇌졸중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의 병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너무나 당연한 이 죽음의 병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지닌 생명은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병균을 벗어나지 못한다.



- 산중일기  中



어제 지인의 모친 부고문자를 받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장례식장 방문은 올해로 벌써 네 번째다.  또래의 경조사는 나이대별로 엇비슷하게 이어진다.  돌잔치가 있고 자녀들의 결혼 소식 그리고 부모님들의 부고소식 차례다.  이제 우리는 슬퍼할 일만 남은 것이다.  작년에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나는 날짜를 새는 방식이 바뀌어 버렸다. 어제도 그랬다. 그래도 우리 친정엄마보다 3년은 더 사셨네.. 부고소식은 다시금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를 소환시킨다.


검은 옷을 입고 옅은 화장을 한 뒤 현관을 나섰다.  선선한 가을공기가 뺨에 닿았고 무더운 여름철이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례는 살아있는 자들의 위안식이기에 날씨가 좋으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한 사람의 생을 마감 지을 수 있는 유예기간은 3일이다.  살아있는 자들의 공식적인 애도기간인 것이다.  조문객들의 일관된 질문들, 상주의 반복되는 답변이 3일간 앵무새처럼 이어지고 조문객의 잔잔한 수다로 상주는 공식적으로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간간히 웃기도 한다.


나는 죽음의 비중이 이토록 가벼운 것에 놀란다.  장례병원의 일사천리 절차에 감탄마저 나온다.  더 이상 죽은 자는 산 사람의 무리에 끼어들 수 없다.  그들과 철저히 격리돼야 하고 깔끔히 사라져 줘야 예의다. 온갖 애착과 권력을 쥔 삶이었더라도 죽었다면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몸 하나만 챙겨 퇴장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사소한 실수 하나 용납하지 못하고 치열하게 계산하고 사는 걸까.  자신의 몸 하나 알뜰히 챙기지 못하고 홀대하다 평균수명도 못 채우고 삶을 끝내는 걸까.  나의 불행을 왜 다른 사람 탓이라고 원망하며 사는 걸까.   


그것은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영원히 내 곁에 머물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죽음은 확실하지만 당장 내겐 찾아온다고 생각하지 않아서다.  


돌아가신 시어머님도 병원에 입원하시고 며칠 만에 유언 하나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친정엄마는 심장마비로 불과 몇 분만에 떠나셨다. 죽음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의미 있는 모든 사람과 반드시 이별한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놓치며 살고 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받은 가르침들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 어머니가 업어주셨던 등의 따스함을 기억해야 한다. 서로 모르던 타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랑으로 업어 키웠던 가족애의 대물림은 삶이라는 숭고한 종교였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이라는 삶의 끈이 끊길 때에야 알게 되면 늦다.  죽음을 가벼이 생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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