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노욕덩어리로 늙어가는 사람

집안마다 최악의 빌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숨어 있다가 싸울 상대가 약하거나 사라졌을 때 약탈하려는 사람을 가장 증오한다.  천박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다. 정의롭지 않다.  싸움은 자신과 대등한 상대이거나 강한 자들과 투쟁해야 옳다.  그리고 상대가 없는 싸움은 이미 싸움이 아니다.  자신의 기억을 악용할 뿐이다.  


인생은 삶의 종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이 끝나고 나면 잔인하게도 그제야 죽은 자의 평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평가라는 것이 상대방의 감정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이다.  회고적 감정은 잘못된 길로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왜곡할 여지가 크다.  부정확한 기억이라는 문제도 간과하면 안 된다.  상대할 당사자는 이미 세상을 떠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이제는 두 노인의 삶을 지켜봐 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그들의 인간됨과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 줄 것도 없어져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녀들의 주관적 감정들 뿐이란 사실이다. 결혼 후 삼십 년을 함께한 며느리인 나 역시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무엇이 이 남은 노인의 확신에 승리를 안겨줄 것인가. 자녀들의 싸움을 부추겨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먼저 가신 분을 애도하기도 삶이 벅차다.  그의 노망에 가까운 빚을 갚을 의사가 전혀 없다.  무의미하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그는 아랫사람을 휘두를 수 있는 집안의 가장 윗사람으로 등극했다.  사람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그에게 권력을 쥐어 주어 보라는 말이 있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인간성이 나오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겁하고 노욕으로 가득 찬 노인이다.  살아생전 형수에게 아무 말도 못 했던 위인이었다.  남편은 웃고 있는 시어머님의 초상화를 보며 술잔을 기울인다.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한 남편이었다.  가족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한 그가 삶의 허망함에 술잔으로 설움을 삼킨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악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어른다움을 상실한 사람은 주변을 괴롭히는데 특화가 되어 있다.  그에게 그 어떤 측은지심도 사치란 생각이 든다.  이런 삶이 참 슬프다.


어떤 사람에게 나이 듦이란 자발적인 봉사나 깊은 이해나 조언, 자신을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에겐 과거의 집착과 노욕으로 가득 차기도 한다.  그는 영원한 삶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인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이제 그는 가파른 내리막으로 떠밀려 곧 잊힐 운명이라는 사실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례식장을 나오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