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인데 이제야 읽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룬 소설은 무수히 많지만 이 소설처럼 간명하게 삶과 죽음을 표현하면서도 진한 여운을 준 작품이 있었나, 기억에 없다. 단편이지만 한 어부의 탄생과 죽음의 서사가 담겨있는 텍스트 안에독자의 상상을 끌어올려 덛부쳐져서인지 전혀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고 나자 우습게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떠올랐다. 지구라는 존재는 우주 어디선가 일어났던 초신성의 흔적이고 수많은 별들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물며 광활한 우주 속 작은 행성인 지구인의 탄생과 죽음은 우주시계에서 관측한다면 가소로운 사건인 셈이다. 우주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관심 따위 없는데 그들의 삶이 보이기나 할까.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작가는 의도하듯 깃털보다 가벼운 인간의 삶을 생략해 버렸다. 그러니 저자는 허무주의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은 상상을 통해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위안을 찾는 동물이다. 우리가 신앙을 믿는 이유기도 하다.
여러모로 실험적인 소설이다. 명료한 문체와 문장과 문장을 잇는 쉼표와 마침표의 선택은 독특했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유명한 '주제 사라마구'의 책에서 느꼈던 기분이 살짝 재현돼서 재미있었다. 비교하자면 '눈먼 자들의 도시'는 문단과 문단 사이가 빽빽이 들어차고 고유명사도 사용하지 않아 힘들었다면, 이 소설은 응축된 짧은 언어와 쉼표가 주는 연결성이 신선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가 서로 밀어내지 않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고나 할까. 죽음은 더 이상 슬프고 격앙되고 괴로움이 아닌 하나의 삶의 과정이라는 설명처럼 읽혔다.
소설은 평범한 한 인간의 생애 중 탄생과 죽음만 다루고 있다. 1부 출산장면이 '아침'이고 2부는 본인이 죽은지도 모르고 하루의 루틴을 밟는 과정을 그린 '저녁'이다.
주인공 '요한네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결국 죽은 후인 '영혼'의 독백뿐이다. 요한네스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평범한 어부로 살다가 평범한 아내를 만났고, 익숙한 삶을 살며 7명의 자식을 낳았고 연금을 받으며 편하게 노후를 살다가 잠자듯 죽었다. 아내가 먼저 떠난 노후에 그를 챙겨주는 것은 딸 '싱네'뿐이다. 나머지 그 많은 자식들은 어디 갔지, 소설은 설명이 없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은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문체는 명료했지만 그 안에 던지는 메시지가 많았다. 그 이유의 원인은 주인공 요한네스의 끊임없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행동은 더딘 그를 소심한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사유가 깊은 인물로 결론지었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관념적이었다. 다가오는 물결을 수용하고 거스르지 않는 인물이다.
나는 영혼이 된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가 하던 대로 하루의 루틴을 밟는 과정, 그리고 과거에 죽은 절친과 젊은 시절 한 때를 동일하게 살아보며 옛사람들을 만나고 물 밑으로 던져놨던 '게멍'을 건져내는 과정을 끝으로 삶을 종료할 때, 문득 세상을 떠난 친정엄마가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친정엄마도 떠나신 그날 하루쯤은 우리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을까, 싶어서였다. 요한네스의 딸 '싱네'의 울음이 내 울음이었다.
우리는 사후세계를 경험하지 못했으니 그저 상상할 뿐이다. 작가는 21세기 과학문명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설득력 있는 후반부 문장으로 날 위로했다.
목적지가 없나? 요한네스가 말한다
없네, 우리가 가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이름도 없지, 페테르가 말한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 하지만 거대하고 고용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지,
환하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될 걸세, 페테르가 말한다
그래, 고민하지 말자. 우리가 할 일은 삶을 되도록 긍정하고 매일매일 일상이라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