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게 무해한 사람

울음을 참으며 사는 사람들 


이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야?  나는 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하민은 나보다 앞서 걸었다.  뒤에서 보니 하민이 자꾸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 '아치디에서' 中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울컥 올라오는 지난 시간들의 고통으로 몇 번을 울었던 것 같다.  그 배경에는 오래전 그 시절, 암묵적으로 요구되었던 불편한 사회적 관념의 상기도 있었고 가장 맑고 순수했던 미성년자 시절, 한치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나의 엄격함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 깨달음 일 수도 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란 소설로 처음 만났다.  과거를 회상하며 시작되는 그녀 특유의 집필기법은 이번 소설에도 예외 없이 반영되었고 천천히 어둠이 내리는 길가로 나아가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나의 과거 속으로 홀리듯 방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어른들은 자신만의 슬픔을 감추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슬퍼도 울지 않는 이유는 그래야 어른이 된다는 조건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억눌린 과거의 감정들은 시간이 흘러도 작아지지 않고 똬리를 튼 기억의 주머니 속에서 단단히 뭉쳐있다는 사실을 안다.  일상의 파편 속에서 불쑥불쑥 균열을 일으키며 상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취해 우는 최악의 술버릇으로 꼽는 사람들을 나는 동정한다.  그렇게라도 해소하는구나 싶어서다.


'내게 무해한 사람'은 총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을 담아내고 있다.  일곱 편 모두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의 미성년이었던 시기를 어른이 된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란 결론의 시작은 관계의 끝을 선포하고 시작하기에 초반부터 울적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소설은 우리 모두의 십 대의 끝과 이십 대 초반을 상상하게 만든다.  미성숙하고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이고 깨끗한 감정이 가져올 그 시절의 아픔들을 알기에 조마조마한 기분이랄까.  그때는 참으로 우정과 사랑이 세상 전부였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배경은 시대적, 역사적 흐름의 원인이기에 이야기에 지대한 영향을 다.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독자들은 어떤 반응으로 읽을까 사뭇 궁금하다.  양성평등을 주장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처우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현재가 있기까지 억압된 약자에 대한 피해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시기를 우리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집애 같은 남자애라는 이유로 까닭 없이 불평등을 당하고 매질을 당하는 굴종이 만연했다.  '601,602' 소설 속에서 오빠에게 매 맞는 아이였던 효진이는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효진이의 외로움에 서린 분노를 알기에 속상해서 울었다.


아무리 어려웠던 지난 시절도 시간 때문에 희석되고 포장되어 낭만으로 바뀌기도 한다지만 몰아치듯 자신을 스스로 인내하도록 학대했던 감정들은 내재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제는 당당히 커밍아웃을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유로 소설의 첫 문을 '그 여름'이라는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이야기로 장식했다는 위안은 다행이었다.  그녀들의 사랑도 여느 사랑처럼 치열하게 아껴주었지만  결국 욕심과 위선 때문에 이별한다.  수많은 남녀 간의 이별이야기를 읽었지만 나는 그래도 그녀들의 이별이 미숙하나마 가장 완성형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이들처럼 속깊이 고민하고 배려하다 상대를 위해 이별을 선택할 수 있나.


정신적으로 개방되지 않고 사회적 약자에게 너그럽지 않았던 그 시절에서 나약한 우정과 사랑은 작은 균열에도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알기에 마음이 아팠왔다.  그 시절을 통과했기에 동의되는 슬픔이리라.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응축된 슬픔의 최고치는 '아치디에서'가 아닐까 싶다.  아들을 위해 딸의 희생을 당연히 강요받던 한국 여성 '하민'과 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던 브라질 청년 '라도'의 만남 때문이다.  환멸을 품고 한국으로 떠나 피신한 아일랜드에서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진심으로 아프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도 여지없이 이별한다.  이들은 용기마저도 완성형이 아니다.


책을 덮고 묘한 슬픔에 잠겼다.  어쩌란 말인가.  다 지난 시간들에 대해!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화가 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침묵 뒤에는 슬픔을 삼키고 주위의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재단하듯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가장 약한 부위를 꺼낼 때까지 곁에 있기만 해그걸로 충분하다는 것.


그들은 무해하다.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저>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 그리고 저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