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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

폭군처럼 구는 과거와 싸우는 사람들



몸이 제압당하거나 갇히는 등 일반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거나 전쟁, 자동차 사고, 가정 폭력, 성폭행처럼 스스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뇌는 스트레스로 발생하는 화학 물질을 연이어 분비하고 뇌의 전기 회로도 계속 활성화되지만 아무 소용없다. 이로 인해 그 사건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 뇌는 신체에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으로부터 달아나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낼 수 있다.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박사는 트라우마에 관련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수십 년간 트라우마를 연구해 온 내용들을 집대성하여 이 책에 담았다. 흔히 사용하는 트라우마란 단어에 담긴 엄청난 무게감을 느낀 독서였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과거에 잊히지 않는 고통스러운 경험의 하나가 아닌 그로 인해 인간의 기본적인 기능(생리, 정서, 공감, 행동억제 등)이 쉽게 조절되지 않는 절망상태다.



트라우마 장애를 안고 있는 환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부터 시작해 관련 연구와 임상 시험, 치료 방법, 사회에 미치는 파장등을 상세히 파헤친 책이다. 충실한 사례와 함께 트라우마를 다루는 사회의 철학과 방향까지 읽노라면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져 뭉클하기까지 하다.



트라우마 환자의 대표적 증상은 불안, 악몽, 딱딱한 표정, 움츠린 자세, 충격적 기억회상 등이 있다. 그런 행동의 근간에는 피해자의 뇌가 위험을 알아차리는 데 매우 집중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이다. 긴장을 놓지 못하고 매우 예민한 상태이기 때문에 안전한 것도 위험으로 간주해서 항상 정신이 경직되어 있는 상태다. 극도의 스트레스상태는 신체의 각 영역의 기관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환자는 일상생활에서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일반적이지 못한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건 무엇이든 피하려 든다.



예를 들어 성폭행을 당한 사람은 다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그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왜냐하면 성과 관련된 일이라면 속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과 반응을 싫어하고 그런 반응 때문에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무력한 자신에게 분노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복되는 자신의 생각에 깊은 수치심마저 느끼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활성화되면 유기체인 한 사람의 전체(몸, 마음, 뇌)에 불균형을 주어 포유류인 우리의 뇌인 기본적인 일들(수면, 식욕, 접촉, 소화, 성적 흥분)에 관여하여 변연계의 극심한 활성상태로 변한다.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하는 뇌의 중심축이 분노나 짜증, 무기력이나 우울감 등의 부정적 감정인 두려움이 자그마한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는 공포 회로가 형성되는 것이다.



뇌간과 변연계의 기본적인 자기 시스템은 자신이 완전히 무너질 것만 같은 위험에 직면하여 공포, 두려움에 압도당하고 생리학적으로 크게 흥분한 상태가 되면 대폭 활성화된다.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꼼짝없이 갇힌 것처럼 공포로 온몸이 마비되고 분노로 눈이 먼 상태가 되고, 마음과 몸은 마치 지금 당장 위험에 처한 것처럼 끊임없이 자극을 받아 흥분한다.



우리나라의 후진국형 재난은 잊힐만하면 일어나 사회안전망에 대한 시민의 불신이 크다. 당장 떠오르는 일만 해도 세월호 참사, 오성 자하차도 참사, 이태원 참사가 있다.


우리의 뇌의 변연계는 유기체와 주변 환경의 관계를 기록하는 지도, 정서적 관련성, 분류, 인지를 담당하고 있는데, 트라우마는 변연계의 기능에 평생 사라지지 않는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본인은 트라우마를 이겨 내고 싶지만 정신적 외상이 큰 경험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위험을 암시하는 실낱같은 단서만 주어져도 활발히 활성화되어 뇌를 뒤흔들어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불쾌한 감정은 신체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 충동적이고도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즉 트라우마는 동물적인 뇌 영역이 생존을 위해 싸우는 상태로 고착된 상태라 하겠다.



이처럼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을 겪은 사람의 뇌는 위험과 안전에 관한 인식이 바뀌고 이전과 다른 신경계로 세상을 살아간다. 지나치게 경계하여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소소한 즐거움을 못 느끼고 사는 것이다. 이들의 뇌스캔 영상에는 스스로 감각을 인지하는 영역 대부분(특히 생각과 기분을 말로 표현하는 언어 섹터인 브로카 영역의 활성이 크게 감소)에 반응이 없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트라우마와 관련된 상황이 벌어지면 신체는 공포와 격렬한 분노, 무기력감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동시에 싸우거나 도망가고 싶어 했다.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게 되면 변형된 뇌로 살아가게 되는데, 감정인지 불능증(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해리증상(조각난 감각의 기억이 현실에 끼어들어 무력해짐), 이인증(자기와의 분리). 자해(존재감을 확인) 등으로 일상의 삶이 피폐해진다.



트라우마의 큰 문제는 일상의 쾌감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즐거움이 사라지고 자신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교감할 수 없고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집단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교감하지 못하는 일상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됨을 의미한다.



트라우마를 이 책에서 심각하게 다루는 이유는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트라우마가 사적 환경인 가정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데에 있다. 사적인 곳에서 은근히 발생하는 트라우마는 공개되지 않고 비밀스럽고 알아차려도 그들은 쉽게 공개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미국에서는 많은 아이가 부모 간의 폭력을 목격하고 있다고 한다. 부모 간의 폭력을 목격한 아이들은 세계관과 자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심한 부부싸움과 폭력, 이해하기 힘든 폭언등으로 불안과 공포로 힘든 기억이 있다. 또한 많은 형제 중에서도 소외되는 경험까지 덧붙여서 불완전한 애착관계를 겪었다.


책을 읽고 이미 정해진 부모와 어쩔 수 없이 사는 아이들의 열약한 환경이 느껴져 가슴이 아파왔다. 약한 존재인 어린 자신을 거부하고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성 애착을 형성하게 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아동기에 부정적 경험의 통계치는 너무나 다양하고 문제점이 많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리적 학대, 신체적 학대, 성적학대, 가정 내 정신 질환, 약물 및 알코올 문제, 폭력문제등 부정적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성장한 아동들은 아래의 위험성의 수치는 모두 높게 나왔다.


1. 흡연가능성

2. 비만 가능성

3. 우울증 가능성

4. 자살 경향성

5. 알코올 중독 가능성

6. 약물 중독 가능성

7. 문란한 성생활



고대 철학자들은 일곱 살을 '이성의 나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 1학년은 살면서 겪게 될 일들의 전주곡에 해당하고, 전두엽의 기능에 따라 삶이 체계화된다. 그리하여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고, 괄약근을 조절하고, 몸으로 행동하기보다 말로 이야기할 줄 알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생각을 이해하고, 내일 일을 계획하고 친구들과 조화롭게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



한국의 통계가 없다고 해서 심적으로 자유로울까. 부모는 아이들이 안전하고 예측하기 쉬운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줄 의무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부모의 역할, 부모로서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살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대처하는 부모의 행동으로 아이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에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다. 보통 재난을 겪으면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본보기로 삼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봐 주는 사람이 침착함을 잃지 않고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면, 끔찍한 사고를 당하더라도 심각한 정신적 흉터 없이 자랄 수 있다. 전쟁 중 부모와 함께 있던 아이들이 안전한 시골에 부모와 떨어져 있던 아이들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한 사례를 보면 부모의 정신적 태도와 삶의 대처가 아이의 정신발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트라우마는 뇌를 변형시켜 놓았기 때문에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여정 역시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과정이다. 트라우마로부터 회복의 길로 가는 방향도 이 책은 친절하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경험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불안장애이기 때문에 치료의 최종 목적은 기억의 정리, 분리, 통합이다.



책에는 트라우마의 증상과 환자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치료 접근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보이는 외부적 증세에 대한 국한된 투약으로 해결하려는 방법은 저자는 극히 지양했다. 트라우마를 안전하게 다룰 수 있다고 입증된 MDMA(엑스터시) 마약 역시 대면치료와 병행했을 때 효과적이었다. 일반적으로 행하는 약물처방에 대한 경각심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아 상당히 걱정스럽게 읽었다.



집착, 충동, 공황 발작, 자기 파괴적인 행동 등 정신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분류되는 행동들은 자기 방어 전략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트라우마에 적응하면, 의료 보건 전문가들이나 환자 자신도 완전한 회복이 너무 멀게만 느껴질 만큼 정상적인 기능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증상을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장애로 여긴다면 치료의 목표가 적절한 투약 계획을 찾는 것으로 국한되고, 결국 환자는 평생 동안 약에 의존해야 한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신장 질환을 앓고 투석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트라우마는 변형된 뇌의 결과로 인하여 신체 곳곳에 비정상적인 반응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치료에 있어 자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감각,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시도로 시작하길 권한다. 즉 몸과의 본능적인 연결을 시작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까지 진행되는 과정이다.



과거에 느꼈던 상처, 고통스러운 감정은 과거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자신의 과거 상황을 스스로 말로 표현할 줄 알 때 치료의 효과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런 훈련으로 연극(심리극)을 적극 추천했는 데, 자신이 스스로 재설정하는 과거의 시간으로써 내면의 지도를 만드는 방법 때문이었다.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변연계를 정리함으로써 치유되는 과정인데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체의 기능을 인지하는 지압, 요가 등도 추천한다.



특히, 트라우마 회복에 효과적인 심리극(연극)은 과거와의 재접촉을 뜻하는데 다시금 충격을 받았던 과거를 소환하는 만큼 관찰자인 '목격자' 역할을 맡은 사람이 중요했다. '목격자'역할을 맡은 사람은 주인공이 구조를 형성하는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여 너그럽고 객관적인 관찰자로 선정된다. 트라우마를 겪은 주인공의 감정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감정의 발생한 배경을 인지시켜 주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상처받고 결핍을 겪은 트라우마 환자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자신의 잘못으로 결정짓고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때 심리극(연극)에서 과거의 시간 속에서 인생을 고쳐 쓰도록 역할을 바꾸기도 하면서 상처받고 멈춰있는 환자를 보듬어주게 되면 큰 도움이 된다.



항상 경계 태세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트라우마 희생자들은 화난 몸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한다. 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감각에 무엇보다 친해져야 하며 신체가 주변 세상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폭군처럼 제멋대로 구는 과거를 흘려보내도록 우리가 힘껏 도와줘야 한다.



트라우마를 제대로 알고 배운 귀한 책이었다.




<몸은 기억한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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