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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맞이하는 방법

인생의 결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너그러워지고 이해심이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것은 바로 내가, 내 인생이 그렇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 인생수업 / 법륜





조직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해의 목표달성의 마무리는 겨울이 아닌 가을이다. 분기별 목표달성의 오차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시기기 때문이다. 매년 가을이 깊어갈 때면 밥 먹듯 야근하는 작은 아들의 퇴근을 보지 못하고 나는 침대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잠들기 전 식구가 모두 채워지지 않은 날의 몸은 무의식 속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새벽녘에 아들방의 닫힌 문을 확인하고 나서야 남은 잠을 보충하길 반복하고 있다.



주말아침 나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온전한 아들의 얼굴을 조심스레 관찰한다. 여지없이 피로와 스트레스가 먼지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주말에도 출근할 수도 있다는 며칠 전 아들의 말이 떠올라 걱정스레 물어본다.



"아니요. 쉴 수 있어요."



먼지 묻은 아들의 얼굴은 일상이 퍽퍽하고 힘겹고 재미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힘없는 자신의 위치를 탓하기도 하고, 대안 없는 조직의 반복된 결론에 지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낯선 모습이 아니다. 바로 남편과 내가 그 시절 그대로 거쳐왔던 모습이다.



나의 직장생활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을까. 아들은 조금씩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였고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초등학생모임 가을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아들에게 하루 종일 누워있는 것으로 피로를 풀지 말고 나뭇잎이 비처럼 쏟아진 뒷산을 가자고 했다. 이쁘게 조성된 지자체 공원이 근사하다고 유혹했다. 지겹고 똑같은 일상의 루틴이 반복될 때 자연은 조용한 해독제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몸을 일으켰다.



가을산은 며칠 전보다 더 깊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편하게 다니도록 깔아 둔 야자매트 위에는 각양각색의 나뭇잎들이 휴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때 가을 양지의 힘으로 뒤늦게 꽃을 피운 숲 속 어디쯤 달콤한 향이 느껴졌고, 어느 나무에서는 피톤치드가 풍겨왔다.



어느 나무에서 뿜은 피톤치드인지 고개를 연신 돌려봤지만 수많은 나무들 틈바구니에서 알리가 없었다. 코를 벌름거리는 엄마를 보던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피톤치드가 나무들이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해 내뿜는 건데 아셨어요? 사람들은 나무들이 내뿜는 일종의 살충제를 마시는 거예요."



나무들의 악의에 찬 비밀을 폭로한 아들은 과장되게 놀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킥킥댄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소리쳤다.



"아, 참 좋네요. 잘 나왔어요."



새로운 오늘의 시간 속에 어제의 우울함을 되새길 필요가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것은 오늘에 대한 낭비가 틀림없다는 확신에 찬 소리였다.



인생이 잘 풀리건 잘 풀리지 않건 그 사실에 묶여 있는 것은 실속이 없다. 인생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지, 일어나기를 바라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아 힘들어하고 삶을 허비하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배울 수 있고 경험을 토대로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젊은 시절은 완벽하게 일할 건강한 신체를 주는 대신 실패와 고통을 정면에서 부딪칠 현실도 준다. 매 순간 밑바닥을 드러낼 실수가 도사리지만 경험을 마다하면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다. 젊음은 도전의 시기이고 실수할 수 있고 또 마음껏 실패할 시간이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법륜스님의 말씀이 눈으로 확인되는 계절이다. 봄꽃은 청춘이고 단풍은 중년으로 비유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단풍은 봄꽃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아들에게 현재에 충실하되 매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줬다. 조금 어렵더라도 떨어져 생각해 보고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살면 충분하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인생의 결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법륜스님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받아들이고 평화롭게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을의 정취 속 단풍의 비유로 최고의 찬사를 보내신 것은 그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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