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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by 김경애
코이치로 타카기 <나는 빛에 대해 증언하는 목격자다>

바위산을 뒤로 하고 호랑이 탈을 쓴 자가 커다란 바위위에서 양팔과 다리 한 쪽을 들고 무언가을 말하고 있다. 잡초가 무성한 흙바닥에 양의 탈을 쓴 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으고 낼름 혀를 내밀고 있다. 호랑이 탈을 쓴 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양의 탈을 쓴 자는 혀를 내밀고 있을까? 느낌적인 느낌상 풍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탈을 쓴 사람도 그들의 동작도 그렇다. '나는 빛에 대해 증언하는 목격자다'라는 제목은 더 그렇다. 높은 곳에 선 자와 낮은 곳에 꿇은 자, 말하는 자와 듣는 자, 호랑이와 양의 힘의 대비가 더욱 그 느낌을 공고히 한다. 권력을 가진와 권력을 갖지 못한 자의 대조로 읽히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람이 허구의 이야기를 믿는 능력 덕분에 대규모로 협력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눈에 보이는가?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을 볼 수 있을 뿐 대한민국 국가 자체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단군신화가 가능한 이야기인가? 곰이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우리는 이 집단적 상상을 공유하며 그 신화에 뿌리를 두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류의 세계화를 자랑스러워 한다. 자연상태에서 침팬지 무리도 20~50명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야기를 믿는 능력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 수백 명이 힘을 모아 한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것이 가능했고 도시와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힘을 모으는 것은 항상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평등주의적인 것은 드물었다. 인간의 협력망은 대부분 압제와 착취에 적합하도록 맞춰져 있었다. 지배자와 엘리트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식량으로 먹고살면서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 밖에 남겨주지 않았다. 근대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농부의 잉여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살렸고 또한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농부의 잉여생산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예술이 이제는 지배자와 엘리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성경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다. 자,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그것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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