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어 이야기

by 얄미운 하마

“엄마, 병원에 가기로 했어? “

“직접 가진 않고 버철로 하기로 했어.”

“뭐라고? 버철이 뭐야?”

“버철, 온라인으로 하기로 했다고.”

“아아, 버r츄얼.”

“맞아, 벌츄어얼”

막내딸과 나는 배꼽을 잡고 웃어버렸다.

이 놈의 영어발음은 15년을 살아도 매번 이 모양이다. 가끔 딸들이 고쳐주지만 여전히 안된다. 막내랑 하루종일 버철 때문에 웃었다. 집에서는 웃고 넘기면 그만이지만 직장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리포트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발음 때문에 벌어지는 어이없는 일들이 많다. 약이름 들도 한국에서와 발음이 많이 달라 알아듣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이뇨제 중 하나인 Lasix가 있다. 한국에서는 라식스라고 발음했다. 진짜 발음은 레이식스 비스꼬롬하다. 악센트도 의사소통에 장애물이다. 발음은 어찌어찌 맞았는데 악센트가 틀려 또 못 알아듣는다.


한 번은 유닛에서 shiley를 셜리라고 발음해서 다들 웃은 적이 있았다. shiley는 투석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갖고 있는 카테터를 부르는 이름이다. 사람 이름처럼 발음을 하니 못 알아듣고 몇 번을 말하고 나서야 다들 “샤일리?” 해서 “yes, that is it.” 나도 너무 황당해서 같이 한바탕 웃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처음엔 당황했고 지금은 웃어넘긴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지금이야 웃고 넘어가고 가르쳐달라고 하고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전화를 안 받으려고 벨만 울리면 갑자기 바쁜척하며 저 멀리 사라졌다. 전화영어는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웃지 못할 일이지만 사십이 넘어 새로운 곳애서 새로운 언어로 일을 하려니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지금도 변한 것은 없지만 눈치와 배짱이 늘었다. 전화에 대고 “pardon?”을 한정 없이 해도 기가 죽지 않는 정도?!

어떨 때는 못 알아듣는 상대를 탓하기도 한다. 짬밥이다. 나이도 한몫하는 것 같다. 갱년기 아줌마는 미국에서도 못 말린다. 내가 잘못하고 내가 화를 내는 웃지 못할 이민생활이다.


뉴욕의 특성상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많아 위로가 된다. 의사도 간호사도 물리치료사도 broken english로 잘도 대화한다. 일만 돌아가면 되지 발음이 뭣이 중헌데 하는 배짱으로 매일 일터로 향한다. 십오 년 전 막 이민 와서 일을 시작했을 때 병원문으로 들어가는 게 소가 도살장 끌려가는 것처럼 싫었었다. 문 안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무엇보다도 그 무서운 영어를 해야 하는 이상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당시에 매니저였던 목소리가 걸걸했던 여자, 메리 죠, 너무나 무례했던 사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매니저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영어가 서투른 서너 명의 간호사들을 데리고 일을 하려니 그도 짜증 났겠지. 그렇다고 해도 무례했던 기억이 좋지는 않다.


몇 년 전 나는 집에서 보험회사 care manager로 삼 년 정도 일한 적이 있다. 몸을 써서 직접 일을 하는 것과는 달리 멤버들과 전화로 대화를 하고 모든 기록을 컴퓨터로 남겨야 하므로 영어로 다큐멘트 하는 게 일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당시 매니저였던 사람은 문법하나 철자 하나까지 고쳐 주는 꼼꼼한 사람이었다. 내가 간호사인지 영작문을 하는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몸은 좀 고되지만 hands on skill이 더 필요한 곳으로 돌아갔다.


영어는 여전히 나에게 숙제이다. 틀린 발음들, 모르는 단어들, 어떻게 써야 하는지 헷갈리는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중요한 건 짧고 간결하게, 명확하게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병원 일의 특성상 완벽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만 되면 문법이나 철자 가지고 트집 잡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날마다 영어공부를 한다. 일하는데 큰 지장은 없다 해도 미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도 이해가 안 되는 영어로 된 책을 소리 내어 읽고 타이핑을 하며 필사를 하고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고 모르는 발음은 동료들이나 딸들에게 물어본다. 어차피 원어민들과 같을 수는 없다. 그냥 노력하는 거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를 쓰게 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