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상륙한 이념 전쟁

세계속의 러시아 정교회

by 이헌철
image.png 김정일의 지시로 2006년 건립된 평양 정백구역의 성삼위성당 @m.blog.naver.com/pohangwrite/223489126077

1900년, 서울 정동 러시아 공사관에 흐리산포스 셰트콥스키(Chrysanph Shestkovsky) 신부가 러시아 공사관 임시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집전했다. 그후 10903년 정동부지에 성 니콜라이 성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조선은 격변의 시대였다. 러일전쟁이 터지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나라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교회는 묵묵히 선교를 이어갔다.

하지만 1917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공산화된 조국은 더 이상 조선의 정교회를 지원할 수 없었다. 재정 지원이 끊기자 선교단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18년 말, 사제 한 명과 한국인 직원 두 명만 남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선교단 소유의 밭을 직접 일궈가며 간신히 버텨야 했다. 1922년, 한국의 러시아 정교회는 부득이 일본 정교회 관할로 넘어갔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1920년대, 평양을 중심으로 강경한 반공 성향의 '해외 러시아 정교회'가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만주와 한반도로 피신해온 백군파(레닌의 볼세비키 혁명세력 붉은 군대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이라 백군/White Army라 불리웠다)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소련 총영사관과 대립하며 ‘반공을 기치로’ 교회 활동을 펼쳤다. 평양의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특별히 강경했다. 이들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을 ‘배교자’로 규정했다. 1927년 세르기 총대주교가 소비에트 정권에 충성을 맹세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모스크바는 신앙을 배신한 적이었다.

이는 러시아 망명교회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생존을 위해 우상에게 무릎 꿇느니, 차라리 망명의 고독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조국과도 단절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한반도는 이미 러시아 정교회 이념 전쟁의 전선이 되어 있었다.


1945년, 해방 그리고 분열의 씨앗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들어왔다. 평양의 정교도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들 대부분은1920-30년대 해외 러시아 정교회에 속해 있던 강경 반공주의자들이거나 그 자녀들이었다. 그들에게 소련군은 신앙의 적이었다. 교회를 파괴하고, 성직자를 처형하고, 신자들을 수용소로 보낸 바로 그 세력이었다. 공포 속에서 그들은 급히 월남했다. 서울의 한국 러시아 정교회 선교회로 들어간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옳았다. 실제로 북한에 남은 교회는 완전히 소멸했다. 신앙의 자유는 사라졌고, 정교회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월남한 신자들은 목숨과 신앙을 동시에 지킨 셈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울 선교회를 이끌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신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소련이 승전국이 되면서 주한 러시아 교민사회와의 관계도 개선되고 있었다. 폴리카르프 신부는 화해를 꿈꿨다. 갈등을 끝내고 러시아 정교회가 이념을 넘어 다시 신앙의 일치를 이루기를 바랐다.

하지만 평양에서 월남한 신자들의 눈에 이것은 배신이었다. “모스크바와 화해한다고? 그들은 우리를 박해한 공산주의자들 아닌가!” 그들은 소련군의 공포를 직접 경험했다. 가족을 잃고, 교회를 빼앗기고, 목숨을 걸고 월남했다. 그런 그들에게 모스크바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불안과 분노는 급속도로 커져갔다. 미군정과 남한 정부도 긴장했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 모스크바와 교류하는 종교 지도자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저 신부, 빨갱이 아닌가?”

image.png 서울 성 니콜라이 러시아 정교회 @namu.wiki/w/서울%20성%20니콜라스%20대성당

1948년12월, 화해를 꿈꾼 신부의 추방

결국 폭발했다. 1948년12월, 반공 성향의 신자들이 폴리카르프 신부를 선교회에서 축출하고 남한에서 추방되었다. 그는‘빨갱이’로 몰렸다. 모스크바와 화해를 시도하고 대화하려 했다는 이유였다. 돌이켜보면, 폴리카르프 신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꿈꿨던 러시아 정교회의 재통합은 실제로 2007년에 이루어졌다. 60년이 걸렸지만. 그는 시대를 앞서간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1948년 한반도에서, 그의 이상주의는 용납되지 않았다. 남북이 총부리를 겨누고 이념 전쟁이 폭발 직전인 상황에서, ‘화해’를 말하는 것은 배신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한다. 폴리카르프 신부의 선택은 옳았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의 순진함에는 문제가 있었다. 1948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은 여전히 스탈린 정권의 통제 아래 있었다. 세르기 총대주교의 1927년 충성 선언 이후, 교회는 사실상 권력의 도구였다. 그런 교회와 ‘화해’한다는 것은, 결국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월남한 신자들의 공포와 분노는 정당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박해를 직접 경험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한국 교회 선배들처럼, 그들도 우상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


1956년, 제3의 길- 지혜인가, 타협인가

폴리카르프 신부가 추방되고 8년이 지난 1956년, 한국 정교회는 극적인 선택을 했다. 모스크바도, 해외 러시아 정교회도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로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모스크바를 선택하면 ‘빨갱이’ 교회가 되고, 해외 러시아 정교회를 선택하면 반공 정치 조직이 될 터였다. 그 어느 쪽도 원하지 않았던 한국 정교회는 제3의 어머니 교회를 찾았다. 이 선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지혜로운 중도였을까, 아니면 원칙 없는 타협이었을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서 냉전에서 상대적으로 중립적이었다. 그리스 정교회 전통을 이어받은 곳으로, 정치적 색깔이 덜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정교회의 선택은 ‘양쪽 모두의 잘못된 길을 피한 지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명확한 입장을 회피한 것일 수도 있다. 망명 러시아 정교회는 분명했다. “우리는 권력에 타협한 모스크바를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의 입장은 극단적이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원칙이 있었다.


오늘날, 여전히 두 개의 교회

2018년 이후, 한국에는 크게 두 개의 정교회가 존재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산하 한국 정교회(대표교회:성 니콜라스 교회, 현재 9개의 지역 교회가 있음)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대한교구(대표 교회 그리스도 부활성당, 평양을 포함해 7개의 성당이 있음)가 있다. 백 년 전 분열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해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것인가? 이념과 정치가 여전히 신앙을 갈라놓고 있다는 것이다. 폴리카르프 신부가 추방당하던 1948년 12월 그날 밤 누군가는 “우리가 교회를 지켰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빨갱이를 내쫓았다”고 환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우상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한 것은 옳았다. 1948년 모스크바는 여전히 스탈린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과의 화해는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월남한 신자들이 “안 된다”고 선을 그은 것은 정당했다. 문제는 다음 문장이었다. “안 된다” 다음에 “그러니 당신을 추방한다”가 아니라, “그러니 함께 기다립시다”가 왔어야 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하되, 형제를 내치지는 말았어야 했다. 진리를 지키되, 폭력을 휘두르지는 말았어야 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했다. 하지만 그는 타협한 동료 목회자들을 “친일파”라 낙인찍어 추방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원칙은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사랑은 그 누구도 베지 않았다.

image.png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대한교구 대표 교회 그리스도 부활성당 예배

image.png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대한교구 대표 교회 그리스도 부활성당 예배 @churchkr.com/2025/04/27/서울-그리스도-부활-성당-영명축일에-관할-대주교-예/

7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2026년 오늘날, 한국에는 여전히 두 개의 정교회가 존재한다. 한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의 한국 교구이고, 다른 한쪽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의 대한교구다. 100년 전의 분열이 해결되기도 전에, 우리는 더 잔혹한 비극 앞에 서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단순히 국경의 충돌을 넘어, 한 우물에서 세례를 받은 형제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정교회 내부의 거대한 상처가 되었다. 모스크바 측은 ‘성전(Holy War)’을 주장하며 참전을 독려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은 이를 ‘형제 살해의 죄’라며 비판한다. 2018년 양측의 단교 이후, 이제는 성찬례마저 함께 나누지 못하는 '영적 단절'의 시대가 되었다.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전히 “빨갱이”를 찾아 헤매고, “수구”를 지목한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념이 다르면 대화를 거부하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형제를 적으로 만든다. 75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1948년 그날 밤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선(戰線)이 곧 우리 마음속의 이념적 전선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망명 러시아 정교회는 80년을 버텼고 결국 승리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의 피 위에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순수성을 지킨 신앙은 결국 이긴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는 묻는다. 승리했다면, 왜 아직도 갈라져 있는가? 신앙을 지켰다면, 왜 아직도 사랑을 놓쳤는가? 만약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신부님, 당신이 꿈꾸는 화해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스크바는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권력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들과 악수하는 것은 우리가 거부한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을 내쫓지는 않겠습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언젠가 모스크바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그날까지. 2007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원칙도 놓지 않고, 사랑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쉽지 않다. 십자가는 원래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길이 있는가? 한반도에 상륙한 러시아 정교회의 이념 전쟁은,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신앙은 권력보다 큰가? 당신의 사랑은 이념보다 깊은가? 그리고 진리와 사랑, 그 둘을 함께 붙잡을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아직 십자가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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