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음악의 나라, 러시아
한 콘서트홀에서 울려 퍼진 장엄한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중 마지막 악장 <키예프의 대문>이었다. 금관악기가 쏟아내는 웅장한 화음과 팀파니의 울림이 객석을 압도했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쏟아지는 순간, 문득 이 아름다운 음악이 사실은 한 친구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우정: 39세에 멈춘 예술가
1873년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아파트에서 비보가 전해졌다. 건축가이자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이 동맥류 파열로 급사했다. 겨우 39세였다. 그의 친구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충격에 빠졌다. 두 사람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었다. 서로의 예술에 영감을 주고받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하르트만은 무소르그스키에게 시각적 상상력을, 무소르그스키는 하르트만에게 음악적 서사를 선물했다.
1874년 2월, 또 다른 친구 블라디미르 스타소프가 하르트만의 유작 전시회를 기획했다. 400여 점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건축 스케치, 수채화, 무대 의상 디자인까지 전시장을 거니는 무소르그스키의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딛고 일어섰다. 친구가 남긴 그림들을 음악으로 되살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불과 몇 주 만에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10개의 그림을 10개의 음악으로 옮기고, 그 사이사이에 '프롬나드(산책)'라는 간주곡을 넣었다. 마치 자신이 전시장을 거닐며 하르트만과 대화하는 것처럼 작곡했다. "여기 난쟁이 그림이 있네. 자네 참 기발한 상상력이야." "이 병아리 의상은 정말 귀엽군." "키예프의 대문 디자인은... 자네가 꿈꾸던 러시아의 웅장함 그 자체야."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은 거칠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때로는 불협화음도 서슴지 않았다. 전통적인 피아니즘(Pianism)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생생한 감정과 이야기가 살아 숨 쉬었다. 친구를 향한 그리움이, 러시아 민중의 숨결이, 예술가의 영혼이 건반 위에서 뛰었다.
두 번째 우정: 혼자가 아니었던 혁명가
사실 무소르그스키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5인조'라 불리는 작곡가 그룹의 일원이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는 문화적 각성기를 맞고 있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의 영혼을 문학으로 담아냈다면, 5인조는 그것을 음악으로 해내려 했다. 밀리 발라키레프, 알렉산드르 보로딘, 체사르 큐이,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이들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모두 '비전문가'였다는 것이다. 발라키레프를 제외하고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다. 무소르그스키와 큐이는 군 장교였고, 보로딘은 화학 교수였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사관생도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강점이 되었다. 유럽 음악 아카데미의 엄격한 규칙에 길들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유로웠다. 러시아 민요의 선율을 과감히 차용했고, 5음 음계를 실험했으며, 변박과 불협화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서유럽의 모방이 아닌, 러시아의 음악을”—이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5인 중에서도 무소르그스키는 가장 급진적이었다. 그의 음악은 너무 거칠고 투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 거칠음 속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생명력이 있었다. 《전람회의 그림》은 바로 그런 무소르그스키다움의 정수였다.
세 번째 우정: 사후에도 계속된 헌신
1881년 3월,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알코올 중독과 가난에 시달리다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 중 상당수는 미완성이었고, 완성된 작품들도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져 있었다. 이때 나선 사람이 림스키코르사코프였다. 5인조의 막내였지만, 이론과 관현악법에 가장 정통했던 그는 무소르그스키의 유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완성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편곡했고, 흩어진 악보들을 모았으며, 연주 가능한 형태로 다듬었다. 물론 논란도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편곡이 지나치게 세련되어 무소르그스키의 원래 거칠음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무소르그스키의 많은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친구의 천재성을 믿었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람회의 그림》은 또 다른 여정을 떠났다. 1922년,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이 피아노곡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러시아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의뢰였다. 라벨은 무소르그스키의 원곡이 지닌 색채감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오케스트라의 팔레트로 화려하게 펼쳐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이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의 손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콘서트홀에서 듣는 《전람회의 그림》은 대부분 라벨의 관현악 버전이다. 무소르그스키의 원곡이 지닌 투박한 힘에, 라벨의 세련된 색채감이 더해져 보편적인 걸작이 되었다.
우정이 만든 불멸의 유산
생각해 보면 《전람회의 그림》은 여러 겹의 우정으로 쌓아 올려진 기념비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쟁과 효율을 강조한다. 누군가의 성공은 나의 실패처럼 느껴지고, 협력보다는 경쟁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전람회의 그림》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정한 위대함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과, 한 사람의 재능은 다른 사람의 헌신으로 꽃피고, 그렇게 피어난 예술은 시간과 국경을 넘어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것을 들려준다.
<키예프의 대문>이 울려 퍼지는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세 친구를 떠올린다. 그림을 그린 하르트만, 그것을 음악으로 되살린 무소르그스키, 그리고 그 음악을 보존한 림스키코르사코프 이 세사람이다. 그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음표가 아니다. 우정과 헌신, 그리고 예술이 인간을 어떻게 불멸로 만드는지에 대한 증명이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문득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친구인가? 누군가의 재능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그가 남긴 것을 소중히 지키려 애쓰는 사람인가?